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무책임한 후손들 門이 사라진 서울

세상보기---------/현대사회 흐름

by 자청비 2008. 2. 12. 20:03

본문

무책임한 후손들 門이 사라진 서울

 
<매일경제>
 
서울은 문(門ㆍGate)의 도시였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에 자리 잡은 조선 수도 한양은 거대한 성곽도시였다. 성곽도시였기 때문에 드나드는 문이 여러 개 있었고, 성곽 안에 자리 잡은 각 궁궐에는 또다시 여러 개 문이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각 문에는 음양오행을 중시한 동양철학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서울은 문 없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서울 정문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고, 조선 정궁인 경복궁 정문 광화문이 복원을 이유로 해체되면서 서울은 가장 중요한 2개 문을 동시에 잃어버린 도시가 된 것이다.

이제 서울 성문 8개 중 원형을 그나마 보존하고 있는 것은 4대문 중 하나인 흥인지문과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 등 2개뿐이다.

서울 성곽에는 전부 4개 대문과 4개 소문이 있었다.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이 있었다.

이 문들은 각기 동대문은 '인(仁)', 서대문은 '의(義)', 남대문은 '예(禮)'를 의미했고, 북문인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문을 열어 두면 아녀자 음기가 움직인다 하여 닫아두고 그 근처에 '지(智)'를 상징하는 홍지문(弘智門)을 별도로 두었다. 신(信)은 보신각을 뜻한다.

숭례문은 '불로 불을 막는다'는 풍수지리에 기반을 두고 지어졌다.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글씨가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화문 앞에 불을 먹는 해태상을 세운 것도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불로 불을 막으려 세운 숭례문이 불타면서 4개 대문 중 제대로 남은 것은 이제 흥인지문(동대문) 단 하나다.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마루턱에 있었던 돈의문(서대문)은 1925년 도시개발 계획을 추진한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시대에 따라 '서전문' '신문' '새문'으로 불렸던 돈의문은 조선시대 500년간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 일제는 돈의문을 철거하고 돈의문 목재와 기와를 일반에 경매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북문이었던 숙정문은 축조한 지 18년 만인 1413년에 문을 폐쇄하였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기며 석축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현재 삼청터널 위쪽에 있는 문은 1976년 복원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문화재로서 가치는 없다.

4소문 운명도 비슷하다. 현재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소문은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이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건립되어 영조17년(1741) 새롭게 개축했으며 자하동에 있다 해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숙정문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북문 노릇을 했다.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는 광희문이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뒤편에 있는 이 문은 도성 안에 살던 백성들 시신이 드나들던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고도 불렸다. 현재 문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동북 지역 소문인 홍화문은 주로 동소문이라 불렸고, 중종 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삼선교로 넘어가는 길 왼쪽에 숨어 있는 현재 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최근 복원한 것인데 그마저 위치가 달라졌다. 교통량이 많은 대로 때문에 원래 위치를 빼앗긴 것이다.

서남쪽에 있던 소덕문(서소문)은 소의문이라고도 불렸고 1924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중대범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처형하러 가던 통로였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인 문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동명만이 남아 그 옛날 소의문을 기억하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