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의 이름

또다른공간-------/생활속의과학

by 자청비 2008. 3. 8. 08:52

본문

[생활 속 수학이야기](5)일상에서 사용하는 수의 이름

 

[경향신문]

 

두 운전자가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같은 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려고 하다가 접촉사고가 발생하였다.
A :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요?”
B : “튀어나오긴 누가 튀어나와요? 내가 왼쪽깜박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려는 찰나에 당신이 끼어들었잖아요!”
A : “나도 깜박이를 켜고 오른쪽 차선으로 바꾸려는데, 순식간에 당신이 끼어든 거요!”

여기서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둘 중 누가 잘못했을까? 정답은 B이다. 왜 그런지 따져보기로 하자.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대화 속에서 수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찰나’, 와 ‘순식’이 그것인데, 둘 중 어느 것이 더 작은 수일까? 정답은 ‘찰나’이다. 왜냐하면, ‘순식’은 10-16이고 10의 -16제곱이고 ‘찰나’는 10의 -18제곱이므로 찰나는 순식의 1/100이기 때문이다. 도로에서는 대등한 위치에서라면 조금이라도 먼저 빠른 시간 안에 행동을 한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실제 도로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정황이 참작되어 판단되지만,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쓰는 일상 언어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수가 들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의 이름으로서 먼저 생겼는지, 일상 언어로서 먼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생활에서 쓰이는 수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예전에 재미있는 젤리 광고 중에 “방금 뭐가 지나갔냐?”,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라고 느리게 꿈틀대는 애벌레를 풍자한 것이 있었다. 평소에 엄청나게 느린 애벌레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조금만 빨라도 눈 깜짝할 사이처럼 엄청나게 빠르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렇게 ‘순식’은 우리는 눈을 깜짝 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동안의 매우 짧은 순간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인다.

오상원의 <모반>이라는 소설에는,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총성이 요란하게 주위를 뒤흔들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찰나’는 아주 가는 비단실에 날카로운 칼을 대어 끊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매우 잘 다듬어진 칼이라면 아주 가는 비단실을 대자마자 순간적으로 끊어질 것이므로, 매우 짧은 시간일 것이다. 찰나는 10의 -18제곱이지만 시간적으로는 1/75초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는 무언가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할 때, ‘모호하다’고 한다. ‘모호(模糊)’는 소수점 아래 13자리 수, 즉 을 나타내는 불교 용어이다. 소수점 아래로 0이 13개 있는 만큼이나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민가수 조용필의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란 노래에서도 수가 담겨 있다. 정해진 공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그 곳을 ‘허공(虛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허공’도 사실은 수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허공(虛空)’은 10의 -20제곱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작은 수이다. 불교에서도 ‘허공’은 빛과 모양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로, 너무나 작은 나머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주 작은 불순물조차 없이 깨끗할 때 우리는 ‘청정하다’고 한다. 이 ‘청정(淸淨)’은 10의 -21제곱을 나타내는데,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작은 수라는 뜻을 지닌다.

반대로 큰 수를 가리키는 용어도 일상에서 많이 쓰인다.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성으로 진격할 때, 뒤에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를 포섭하기 위해 시조 <하여가>를 불렀는데, 이에 정몽주가 답하여 부른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는 매우 유명하다. 여기에서의 ‘골’은, 우리가 무언가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강조할 때 흔히 쓰는 순 우리말로서, 10의 16제곱(경)을 뜻한다는 사람도 있고 10000을 나타내는 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골이 경을 뜻한다고 할 때, ‘골백번’은 10의 16제곱x100번이므로, 포은의 충절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루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상야릇할 때 ‘불가사의하다’라고 하는데, ‘불가사의’ 역시 10의 64제곱을 나타내는 불교 용어이다. 수가 너무 큰 나머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최근에 대한민국의 첫 쇄빙선(碎氷船 : 얼음을 부수면서 운항하는 배)의 이름을 ‘아라온호’라고 지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아라온’은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 ‘아라’와, 100 또는 ‘모두’를 뜻하는 순 우리말 ‘온’을 붙여 만든 이름으로, 세계의 모든 바다를 누비라는 의미 있는 이름이다. 누군가가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널 사랑해” 라고 한다면, 100가지의 마음, 즉 마음 모두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뜻이므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온’의 흔적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온몸’, ‘온갖’, ‘온 나라’, ‘온음표’ 등이다. 온음표는 알다시피 한 마디 전체를 연주하라는 음의 길이를 나타내는 음표이다.

이렇게 ‘온’처럼 백이나 천, 만 등이 ‘많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접두사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백날 가봐야 소용없다’ 등의 ‘백’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수를 밥 먹듯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왜 순식간에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니까요.”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상당히 수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도 모르게 수학적인 소양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닐까?

〈 이화영교사 | 수학과 문화 연구소 〉

'또다른공간------- > 생활속의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최초의 우주인  (0) 2008.04.08
왜 미지수는 X로 표시할까?  (0) 2008.03.11
포의 소설속 수학이야기  (0) 2008.03.08
우리나라 수학의 역사  (0) 2008.03.08
야구 선수 타율의 모순  (0) 2008.03.0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