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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창동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8. 4. 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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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시절을 묻자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영화감독 이창동

영화감독 이창동(54). 그는 몇년 전부터 일체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간혹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해외 영화제에 참석하고 공항에 입국하는 그의 사진이 고작이었다. 그가 모교 대구고를 방문하기 위해 지난 18일 대구를 찾았다. 이날은 대구고 개교 50주년을 맞아 12회 동기생들이 마련한 행사였다. 이 감독은 동기생 20여명과 함께 학교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는 동기들의 양해를 얻어 함께 참석했다. 이 감독은 시종 ‘인터뷰 불가’ 선을 그었다. 그는 이미 인터뷰 거부 때문에 많은 신문 기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지금 인터뷰를 하면 그 선이 무너진다고 했다.

 

기자는 10여년 전부터 그와 알고 지냈다. 기자로서 또는 팬으로서 교분을 트고 있었다. 사적인 자리는 여러번 있었지만 오늘은 기자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감독이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그의 심경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 불가'에서 '기자로서가 아니라면'을 거쳐 급기야 이날 모임의 스케치를 허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날 5시간에 걸쳐 밀착 취재했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어느 취재보다 힘이 들었다. 그러나 늦은 밤 동대구역 가는 차에 동승까지 하면서 그로부터 듣고 싶던 것 대부분을 들었다.

 

◆이창동의 학창시절

고교 동기회는 곧잘 사람을 무장 해제시킨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이! 동기야"라는 말로 모든 경계가 무너진다. 이날 이 감독의 모습도 그랬다. 농담을 섞어 격의 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고교동기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그의 별명이 ‘도구대’라는 것도 이날 처음 들었다. ‘도구대’는 ‘절굿공이’다. 얼굴이 길어 절구대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은 좀 길다. 그는 전교 3등으로 대구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늘 끝에서 맴돌았다. '성적이 끝에서 두번째'라는 것이다. 끝이 누구였느냐고 물으니 “시험 안 친 친구였다”고 했다. 결국 그가 꼴찌였던 셈이다.

 

동기들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점을 많이 얘기했다. 늘 골똘하게 생각하고, 글을 잘 썼다는 것이다. 그도 “백일장 투어 ‘꾼’이었다”고 했다. 교내 백일장뿐 아니라 신라백일장 등 도내백일장에 늘 그의 이름이 올랐다. 심지어 문예반 선생님이 바쁠 때는 그에게 교내백일장 심사를 맡기기까지 했다.

 

대한극장이나 대도극장에 몰래 담을 넘어가 공짜로 쇼 구경을 하는 등 악동의 모습도 동기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그런데 물감 살 돈이 있어야지.” 그는 가난했다. 명덕시장 근처 다락방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한복 삯바느질로 4형제를 키웠다. 4형제(필동·기동·창동·준동)의 우애는 지금도 깊다. “뭐 가진 것 있어야 틀어질 일이 있지”라고 했지만 그들의 우애는 유별스럽다 할 정도로 돈독하다.

 

◆전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

하루에 2갑 이상 피우는 골초답게 재떨이에는 꽁초가 고슴도치처럼 꽂혀 있었다. 이 감독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건배주인 폭탄주 1잔에 몇 잔의 맥주를 비웠다. 혼자만 술 마신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자는 그에게 물어봐야 할 것들을 '들이'밀었다. 장관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뭐냐고 운을 뗐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뭐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참여정부가 내게 주어진 환경이고 운명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열심히 일했다”는 교과서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상처를 많이 입었다고 들었다. 어떤 일이었나?"라고 묻자 그는 “그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언론에 종사하고 있으니까 잘 알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당시 그는 관용차와 운전기사를 마다하고 자신의 승용차로 출퇴근하고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지만, 언론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일부 언론사에는 특별취재팀이 꾸려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참여정부의 첫 장관들의 비리를 캐기 위한 것이었다. 깔끔한 성격의 그가 가족까지 들쑤시는 이런 등쌀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받았지만 장관으로서 그는 역대 장관 누구보다 많은 문화비전과 기초예술정책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국가가 경제발전이란 가치만을 지향해 오다 보니, 문화적 관점이 부재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화예술, 체육, 관광, 청소년 등 전 부문에 걸쳐 비전을 세우고 바람직한 방향 설정을 하고, 그것을 위한 중장기 정책과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마련해야 했다. 그야말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 계획들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앞으로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참여 정부의 문화정책’이란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장관시절에도 일부러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며 “문화예술 정책은 정권의 향방에 좌우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당시 정책이 참여정부가 아니라 각 분야 현장 사람들이 함께 만든 정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묻자 “내가 평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며 “진정한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감독으로서 이창동

많은 영화인들이 장관 이후 그의 작품에 주목했다. 2004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나 영화계에 복귀한 그는 네번째 작품 ‘밀양’을 내놓았다.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현장에 돌아오면서 부담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무슨 부담? 장관 출신이란 부담? 나는 그냥 나다. 현장에서 나는 감독 이창동일 뿐이다. 나는 늘 내 스스로의 기준과 싸운다”고 했다.

 

그의 영화는 늘 인간 본성과 억눌린 사회 구조의 틈에서 소통하고픈 욕망을 짙은 리얼리즘에 담고 있다. 그러나 일부 팬들은 그의 영화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내놓기도 한다. 그는 “소통이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때 의미가 있지 않나?”라고 잘라 말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 일탈하려 한다. 영화 매체가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소비’되는 영화가 아닌 ‘소통’하는 영화를 꿈꿀 뿐이다. 영화는 문학 같은 다른 예술처럼, 사람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일까? 그게 내 고민이다."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외국영화제용 감독이란 비판도 있다"는 말에 그는 “내가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그런 비판 금시초문”이라며 펄쩍 뛰었다. “나는 항상 힘들게 소통하려고 해서 문제다. 나는 지금까지 외국영화제를 위해 단 한번도 영화를 만들어 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관객들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물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

 

최근 한국영화 침체 이유에 대해 그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열쇠는 창의성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 창의성을 죽이고 있다면,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새벽 3, 4시에 자서 아침 9시에 일어난다. 차기작에 대해 묻자 “고민 중인 이야기가 있긴 한데, 아무래도 소통의 방식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밤새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셀 만도 한데 머리카락이 새카맣다. "염색했느냐?"는 말에 “안 했다.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머리가 까맸다”며 웃었다.

 

◆이창동의 삶과 생활(일문일답)

 

-요즘 어떤 음악을 듣나?

"옛날에 좋아했던 음악들 모아서 다시 녹음해서 거듭거듭 듣는다. 나는 정서적인 음악이 좋다. 감정이 풍부하고 페이소스가 있는 음악들. 나는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받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 것 같다."

 

-최근 읽은 소설 중에 추천하라면?

"존 쿳시의 소설들은 항상 좋다. 요즘 문학에도 정신과 철학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의 소설들은 여전히 우리 삶을 사유하게 한다. 레이몬드 카바도 다시 읽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우리 일상에 숨은 치명적인 요소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행복하나?

"글쎄, 행복감이란 것도 학습되는 것인데,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걸 학습한 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요즘은 일상 속에서 가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많이 발전한 거다."

 

-연기력 있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중에 특히 좋아하는 배우는?

"나는 내 영화에 등장했던 모든 배우들을 사랑한다. 누굴 특히 더 좋아하느냐고? 모두가, 특히 주인공들은 다 나의 분신, 페르소나 아닌가?"

 

-인간을 사랑하나?

"‘사랑’이란 거창한 말보다 그냥 ‘연민’이라고 하자. 나는 인간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화만큼 인간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이 없다. 물론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는 이날 오후 11시 KTX편으로 서울로 떠났다. 편하게 동창들 만나러 온 대구행에 기자가 달라붙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사석이 아니어서 곤욕스러운 것은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은 늘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상대를 압도하면서도, 강압하지 않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성찰하는 듯 깊은 눈을 가졌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 끌어안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영화라는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 이창동은?=195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에 소설 '전리'가 당선돼 등단했다. '운명에 관하여'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이상문학상 우수상과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19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 각본 조감독.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1996년 '초록물고기'로 감독 데뷔. 1999년 '박하사탕'. 2002년 '오아시스'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2003년 2월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 2004년 6월 퇴임. 2007년 자신이 만든 영화 '밀양'으로 전도연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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