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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녀' 아나스타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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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8. 5. 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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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1915

 

1984년 2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양로원에서 앤더슨 부인이라는 노부인이 사망했다. 노부인은 1920년 베를린에 나타나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 를 자칭하여 유럽에 화제를 불러 일으킨 인물이었다. 40여년이나 계속된 신원 인증 재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나스타샤라고 인정받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구 소련의 역사에서는 러시아 혁명 발발후인 1918년 7월 16일 황제 일가 전원은 볼셰비키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레닌이 실권을 잡자 체포된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는 하인 몇 명과 함께 우랄 산중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졌다. 그들은 그곳의 '이파체프 관'이라는 건물에서 수개월에 걸쳐 엄중한 감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황녀 4명중 막내인 아나스타샤는 17세로 쾌활하고 장난기가 있어 주위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1918년 7월 16일 심야에 황제 일가 전원은 이파체프관의 지하실에서 총살되었다는 것이 구 소련역사의 통설이다. 실제로 그 다음날부터 황제 일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많은 수수께기가 남겨졌다.

 

사건 발생 4일후 예카테린부르크 교외의 폐광에서 황제 일가의 유품으로 보이는 보석과 의류 일부, 남자의 손가락, 그리고 의치 등이 발견됐다. 유품 전부에 등유 냄새가 남아있어 역시 황제 일가는 모두 살해된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후일 폐광에서 발견된 뼈조각이 42개로는 황제와 가족, 하인 등 총 11명의 유체가 불탄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더욱이 11명이 치아가 몇 백개는 될 텐데 불에 타지 않은 치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한 조사관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살해된 것은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하인들을 합해 총 5명 뿐이고 황후와 네 황녀는 기차를 이용, 페름으로 옮겨진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 함락 전의 페름에서 감금돼 있던 황후와 네 명의 황녀를 보았다는 증언도 제기됐다.

 

아무튼 황후와 황녀들의 행방은 12월 초 페름역을 출발한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사건 1년반후인 1920년 2월 베를린의 란트벨 운하에 몸을 던졌다가 구출된 한 여성이 갑자기 아나스타샤를 자칭해 화제를 불러모은 것이다. 아나스타샤, 즉 앤더슨 부인은 참살 당시 자신만 언니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부상만 당하고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녀의 용모는 사진속의 아나스타샤와 똑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진짜 아나스타샤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한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기도 했다.

 

앤더슨 부인이 진짜로 러시아의 황녀 아나스타샤인가 하는 논쟁은 법정으로 비화돼 1928년부터 1970년까지 신원확인 재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재판 관련 문서만도 8천장을 넘어섰다. 거듭된 논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나스타샤인지 여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재판은 중단되고 말았다.

 

1991년말 옐친 대통령의 지시로 예카테린부르크의 숲을 발굴 조사하던 팀이 황제 부처, 왕자와 왕녀 네명 등 왕족 전원과 하인 등 11명의 유골을 발견했다. 그러나 DNA방식을 사용해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척인 마은트바텐 가의 에딘버러 공작 필립(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공에게서 채취한 혈액과 조합해보았다. 그 결과 세 왕녀의 DNA가 그의 것과 일치했다. 이것으로 세 왕녀가 총살되었다는 것은 확인됐다. 그러나 결국 확인된 것은 아홉구 뿐이었다.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의 것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3년 샤로츠빌 병원의 샘플 보존 선반에서 아나스타샤의 절제한 장의 일부가 보관돼 있는 것이 발견됐다. 게다가 앤더슨 부인이 폴란드 여공 프란치스카 샨츠코프스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어 프란치스카의 조카인 칼이 독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로써 아나스타샤, 앤더슨 부인, 프란치스카라는 문제의 인물 세명의 DNA검사가 가능해졌다. 검사결과 앤더슨 부인의 DNA와 프란치스카의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이로써 앤더슨 부인은 폴란드 여공 프란치스카 샨츠코프스카인 것으로 입증됐다. 그러면 앤더슨 부인은 아나스타샤와 똑같은 외모에다, 황실 내부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러가지 상세한 일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을까.<'뒤바뀐 세계사의 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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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라진 공주’ 는 없었다

 

"사라진 황녀는 없었다."
지난 90년 동안 숱한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돼왔던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미스터리, '사라진 공주'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다. AP통신은 30일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 가족의 것으로 알려진 유골들의 DNA 분석 결과 일가족이 모두 숨져 매장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고고학자들과 미국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난해 우랄산맥 동부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인 알렉세이 왕자와 마리아 공주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유골들은 볼셰비키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당했던 곳에서 가까운 지점에 묻혀있었다. 이로써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그리고 '비운의 왕녀'로 불렸던 아나스타샤 공주를 비롯한 자녀 5명의 유골이 모두 DNA분석으로 확인된 셈이 됐다.


앞서 러시아 당국은 니콜라이 2세를 둘러싼 소문이 끊이지 않자 지난 1991년 처형장소 부근에 묻혀 있던 황제 가족의 유골을 꺼내 유전자 분석을 실시했으며 지난해엔 추가로 발견된 유골들을 놓고 분석작업을 시작했었다.


1894년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된 뒤 자리에서 쫓겨나 유폐됐다. 차르의 가족은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소비에트 병사들에게 총살당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구소련 시절부터 "어린 아나스타샤는 도망쳐서 숨어 살아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러시아와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잊혀질 만하면 한번씩 "내가 아나스타샤다"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곤 했었다.


민중의 적으로 처단됐던 차르 가족은 이제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지난해 발굴된 알렉세이와 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시신들은 19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황실 묘소에 다시 묻혔다. 2000년 러시아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족 7명을 모두 성인(聖人)으로 시성됐다. 문제는 러시아 당국이 "사라진 황녀는 없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해도 여전히 미스터리를 믿는 이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 러시아 황실을 옹호해온 게르만 루캬노프 변호사는 AP 인터뷰에서 "당국이 차르 일가의 비극을 '정치적 탄압에 의한 사건'으로 인정할 때에만 옛 황실에 대한 숭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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