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60주년]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 (2)이명박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만들기 | |||||||||||||||
<경향신문 08월 18일> | |||||||||||||||
ㆍ친일·독재·반공으로 구성된 ‘48년 체제’는 허구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습니다. ‘발전의 역사’였습니다.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 대한민국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역사를 ‘성공의 역사’로 규정했다. 대통령이 자국의 현대사를 실패한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성공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일본 우익들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사관이라며 승리사관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고 있듯이 한국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시대를 지워버리려는 의도에 있다. 민중의 삶을 억압하고, 소외와 탄압으로 끔찍한 희생과 대가를 요구했던 역사적 교훈을 잊고, 가해자와 지배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공을 강조한다는 의심을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같이 국가를 떠받드는 정부의 사업들은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은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이어지는 단계론적 사고에 기초해 있다. 이들은 친일과 독립운동, 남북단절의 역사는 삭제하고 이승만을 ‘건국의 영웅’으로 승격시키려 한다. 박정희 시기를 ‘경제발전의 신화’로 치켜세우며 유신 체제는 고도의 산업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로 정당화한다.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의 목적은 현대사 60년 ‘성공의 역사’의 씨앗을 1948년 ‘건국’과정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건국 60주년’에 대한 대대적 기념 사업들은 이러한 역사인식의 발로다. 이들이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 공론화에 불을 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상 최근까지도 ‘건국’과 ‘광복’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지금 ‘건국’ 용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전까지 객관적 사실 외에 다른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던 ‘건국’이 뉴라이트에 의해 이념 투쟁의 장으로 끌려나왔기 때문이다. ‘건국’은 이들의 역사인식이 집적된 상징어일 뿐이다.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의 ‘건국신화 만들기’
뉴라이트 진영은 지난해에도, 재작년에도 8·15 때마다 ‘건국 XX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왔다. 처음은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자유시민연대 등 보수단체가 주도한 ‘건국 55주년 반핵·반김 8·15 국민대회’였다. 이후 ‘건국절’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보수진영에선 지난해 11월 ‘새 정부’의 등장을 예견이라도 한 듯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중심엔 뉴라이트 학자들이 있다.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이 단체를 기반으로 지난 5월 국무총리 산하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 출범 후 정부는 다양한 ‘건국 60주년’ 관련 사업들을 전개했다. 핵심 사업인 현대사 박물관 건립, 광화문~숭례문 ‘국가의 거리’ 조성을 비롯해 8·15를 기해선 건국 60년 기록물 전시회, 역대 정부수반 가옥 방문 등 철저히 ‘건국’에 초점을 맞춘 행사들을 준비했다. 건국 60년 기념우표, 기념주화도 만들었다. 정부의 ‘시끌벅적한’ 행사 진행을 위해 각 지자체와 시민들도 동원됐다. 정부는 각 지자체에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구성과 관련사업 추진을 요청했다. ‘관주도형 동원운동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광복절 행사 때 등장한 주황색 티셔츠의 ‘국토대장정’ 청소년단은 전경련이 정부와의 교감 아래 각 기업에 할당량을 주고 ‘동원’한 직원 자녀들이었다.
말로는 ‘예산 효율’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거부감과 큰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친일파’라는 용어조차 사용하길 거부하는 뉴라이트는 그 등장 자체가 과거사 정리 작업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며 “60년밖에 안 된 역사는 그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화 만들기’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지난 4월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발표에 대해 “친일문제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며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1948년 체제의 한계, 해방 3년의 시간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인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성공적인 산업화·민주화의 근대화를 거쳐 이제 ‘선진화’로 나아가야 할 차례다. 이들은 이런 논리에 입각해 시장자유주의를 부각시키고 강력한 배제의 논리인 반공주의를 다시 불러들일 태세다. 그러나 편향된 역사인식은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의 법통, 사회주의 혹은 민족주의 좌파 계열 등의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은 다시 배제됐다. 진보적 시민단체, 광복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 진보 정당 등 각종 주체들의 항의 성명이 빗발치고 있다.
뉴라이트의 ‘건국 신화’는 현재 사회 내 다양한 주체들에게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역사적으로도 한계를 갖는다. 이들이 강조하는 ‘1948년 체제’는 배제와 억압, 결핍을 제도화한 국가의 출발이었다. 반공, 친일파, 독재 등 오늘날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모든 것들이 건국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 민주주의에 일정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흉내낸 건국 신화 만들기가 불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8년에는 되살릴 신화가 없어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최초의 민주주의적 선거와 헌법제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출범이자, ‘자유 민주주의’가 최초로 제도화된 것이다. 게다가 국가가 성립될 때 그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제헌헌법은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나아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노동자의 이익 분배 균점권’ 등 사회민주주의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헌법이 제시하는 국가상을 실현해내지 못했다. 우파인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 ‘반쪽 정부’로 출발했다. 이는 후일 냉전 체제를 고착화하는 시작이 됐다고 평가된다. 여러 집단 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수용하지 못했다. 단정 수립에 반대한 김구·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좌익·중도 우파 세력들은 국가 안에 정당하게 통합되지 못하고 모두 배제됐다. 다수의 세력을 껴안지 못하다보니 비정상적 국정 운영이 불가피했다. 그 방식은 폭력적으로 드러났다. 중도파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됐고, 다른 이념의 세력은 가차 없이 처단하는 ‘반공체제 성립’이 시작됐다. 이 과정은 당시 여러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형성되던 좌우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능성을 폐쇄했다. 현 집권 세력의 자본주의·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세력은 ‘외부의 적’과 동일시해 완전히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됐다. 이는 48년 말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법제화됐다. 많은 전문가들은 건국 당시의 이념적 기초와 실천을 담은 것은 헌법이 아닌 국가보안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남한 자본주의 대 북한 사회주의의 편협한 대결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뉴라이트 진영은 이승만 정권의 건국이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모태라며 추어올리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이 외쳤던 ‘자유민주주의’는 냉전시대 ‘반공’ ‘미국’일 뿐이었다. 이것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보통선거권은 보장됐지만, 이 효과를 무력화하기 위해 관권·부정선거를 일삼았다. 이후 개인의 권리 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실종됐다. 이는 자유주의가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동의어를 거쳐 ‘경제적 신자유주의’로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파 세력을 자신의 주요한 권력기반으로 삼아 정권을 유지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현재 우리 사회의 큰 과제인 ‘친일파 청산’이 힘에 부치는 결정적 원인을 마련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당시 민의에 의해서도 심판을 받았다. 이승만의 독재, 부패, 선거 부정 등은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4·19 혁명으로 폭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로부터 1주일이 지난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하야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민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억 투쟁의 굴레’ 물론 48년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할 순 없다. 전쟁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비정상적 상황이 역사를 구성했다. 그러나 뉴라이트 진영의 ‘건국절 만들기’는 역사에 대한 건강한 대응방법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인식에는 북한 사회주의의 실패와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라는 이분법이 깔려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노선 싸움에서 남한의 선택이 옳았고, 그 결과 이만큼 ‘잘살게’ 됐다고 지금을 평가한다. 이른바 ‘승리 사관’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탈근대 시기에 냉전시기 낡은 이념 논쟁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이는 남북 체제의 대립과 반공주의로 자행된 수많은 자유와 인권의 제약, 노동 탄압, 반민주적 행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성보 연세대 교수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억 투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지금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기만해서도 안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원 연구원은 “탈근대의 시기에 정부가 이데올로기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국가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특정 이념이나 국가정체성의 선점이 아닌 한국사(史)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고 논의하는 게 한국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발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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