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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체성을 묻는다3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08. 8. 2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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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2부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

(3)국가정체성 대한 오해 - 자유주의와 미국

 

<경향신문 08월 21일>

 
ㆍ자유민주주의… ‘반공·시장’만 있다

한국의 우파가 국가 정체성을 말할 때 빼놓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자유주의와 미국. 서양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 중심의 구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정치 이념인 자유주의와 역사상의 수많은 선진국들 가운데 하나인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한국의 정체성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을까. 여러 복잡한 요인이 있지만, 간단히 말해 그것은 1948년 8월15일 수립된 정부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고, 그 과정이 미국이라는 외부적 힘의 영향 아래 위로부터 일거에 제도화됐다는 데서 첫 단추가 끼워졌다. 그로 인해 우파들이 생각하는 국가는 반공주의와 시장주의, 미국이라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인식은 오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이것이 우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국가 정체성의 준거로 삼게 된 배경이다.

2008년 8월, 다시 호출된 자유주의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오후 2시.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는 부채를 든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윽고 검정색 대형 승용차들이 하나 둘 도착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정동길 주변을 가득 메웠다. 예배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일동은 ‘국기에 대한 맹세’ 구(舊) 버전을 우렁차게 낭송한 데 이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지난 10년간 좌파세력에 휘둘린 우리 나라를….” 담임목사의 기도문 낭송에 참석자들의 표정은 비장해졌다.
지난 2004년 9월9일 강영훈 전 총리(왼쪽에서 두번째), 이상훈 전 국방장관(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보수 원로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을 성토하며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띠를 몸에 두른 것이 눈에 띈다.|오마이뉴스 제공

제1회 우남애국상 시상식 모습이다. 우남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호다. ‘대한민국사랑회’라는 단체에서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한 이 행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건국 공로를 알리겠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와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가 수상자였다. 이 자리에서 축사를 한 사람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 경제기획원 부총리를 지낸 이승윤씨(76). 그는 이 자리에서 이승만의 자유주의자로서 면모를 강조했다.

“이승만 박사야말로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정책과 자유시장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언론을 검열하거나 통제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주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언론기관들은 마음 놓고 그와 그의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던’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강제폐간됐다. 당시 공보실(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은 “(경향신문이) 절제 없는 정부 비난과 허위보도를 계속해오고 있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그 반성을 촉구하고 시정의 언약을 받았으나 개과의 빛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 국가 없이 국민의 자유가 보장될 수 없고 법을 무시한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언론계가 본연의 위치에서 앞으로 사명 완수에 더욱 더 큰 노력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라며 폐간령을 공포했다.

여기서 ‘자유’는 ‘한국자유총연맹’이라는 우익 단체의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듯 ‘자유진영 대(對) 공산진영’에서의 진영 논리에 의한 자유다. 우남애국상 시상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유에 대한 관념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승윤씨가 말하는 이승만의 자유주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인 이승만은 자유주의자였을 수도 있지만, 그가 수립한 정부와 그것이 만든 사회는 자유주의를 구현했다고 할 수 없었다. 자유 수호를 명분으로 구축된 반공체제는 자유를 옥죄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했다. 제주 4·3 사건처럼 무고한 민간인의 학살을 정당화했던 국가의 비상조치들도 ‘자유’ 수호를 위한 것이었으며,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첫째 왜곡, 사상의 자유 아닌 경제적 자유로

자유주의만큼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이념도 없다.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세력, 절대왕정과 싸우면서 자유주의를 만들어낸 서구에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졌다. 중상주의에 저항할 때에는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강조하는가 하면, 19세기 후반 시장의 실패로 빈부격차와 불황이 심각해질 때에는 모든 개인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측면의 자유주의가 더 강조됐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최소한의 역할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에도 불구, 자유주의가 국가권력을 포함한 어떠한 권력으로부터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점에는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 자유총연맹, 조선일보 6월6일자 ‘촛불시위 반대광고’.
자유주의를 형성할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돼 있지 않았고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가 자유주의를 제도로 도입한 것은 1948년이지만, 자유주의 사조를 처음 대면한 것은 구한말이다. 한국의 자유주의를 연구해온 문지영 박사(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에 따르면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모색했던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지식인들이 자유주의를 가장 먼저 수용했다. 이들 역시 자유주의를 철학적 차원보다는 의회제나 삼권분립, 보통선거권 같은 제도적 형태로 주목했다. 서양이 누리는 부강함의 원천이 그들의 정치제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의미는 일제치하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왜곡됐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일제는 양반 지주 세력의 물적 기반을 약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자유의 길은 활짝 열어놓았지만 사상과 양심의 자유, 정치적 자유, 결사의 자유는 엄격하게 제한했다”고 지적했다. 식민지 하에서 이미 경제적 자유와 양심 사상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중요한 두 축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식민지 하에서 정치적 자유의 유보는 “나라가 망했는데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라는 한탄조의 말에 잘 집약됐다. 이렇게 좁아진 자유주의 이해는 해방 후에는 “나라가 빨갱이에게 위협 받는데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로, 산업화 시기에는 “나라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데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왜곡, 자유주의=반공주의

국가보안법이 규정한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가졌던 이승만 독재는 줄곧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다. 자유주의가 국가의 공식이념으로 강력하게 선전됐기 때문에 그에 맞서 투쟁하는 민주화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유주의를 꼽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 비로소 자유주의가 들어설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박정희의 쿠데타로 무산됐다. 박정희는 이승만으로부터 이어받은 ‘반공국가’ 위에 ‘발전국가’를 덧붙였다. 이제 자유주의는 ‘반공발전국가’를 위해 미뤄졌다. 자유주의가 지금도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반공국가, 반공발전국가 밑에서 개념이 ‘오염돼 버린’ 탓이 크다.

하지만 이 시기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에서는 자유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적’으로 기능했던 시기는 70~80년대 유신체제와 5공 시기였다. “시민권과 정치적 참정권이 근본적으로 부정당했던 이 기간 동안 자유주의는 인권과 절차적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보수야당과 중산층의 이념으로 기능했다.” 반공주의라는 국시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부정의 논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 이념이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함석헌과 장준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자유주의가 민주화운동을 계속 추동한 주된 이념은 아니었다고 했다. “노동의 세력화와 이념적 갈등의 분출에 따라 자유주의는 급격히 보수화됐다. 특히 사회경제적 개혁이나 분배 확대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되면서, 자유주의는 분배와 개혁요구를 ‘반자유주의’로 공격하는, 사회경제적 기득권층을 방어하는 논리로 전락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노동의 자유, 시민사회의 자유보다 자본과 시장이 더 많이 누리는 가치가 돼버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다.

두 개의 자유주의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는 자유주의라는 말이 다시 불려나오기 시작했다. 공병호, 복거일 등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제적 의미의 자유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이 만든 단체 이름도 자유주의 연대였다. 이들은 ‘작은 정부’와 ‘감세’를 자유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정책으로 주장하고 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반면 진보 진영은 국가주의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자유주의를 강조해왔다. 박노자, 진중권 등 지식인들은 개인의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주의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들은 ‘대체복무제’ ‘동성애’ ‘다문화주의’ 등이 자유주의의 주요한 가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시장, 경쟁의 자유’를 ‘개인의 양심, 사상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꼽고 있다. 경향신문이 국가정체성을 묻기 위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전자(56%)를 후자(41%)보다 많이 꼽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자유주의 인식은 일제식민지 이래의 ‘경제적 자유, 개인의 양심 사상의 자유’ 구도가 계속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는 한국에서 뉴라이트의 절름발이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자유주의 명예회복이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문지영 박사는 “최근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실 자유주의의 위기”라면서 “이는 자유주의의 진보성, 도덕성이 소진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박찬표 교수는 “냉전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로서 보수세력에 의해 전유되고 있는 자유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의 내용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자유주의의 기본적 문제 의식인 개인의 자유와 인권 등을 국가로부터 지키는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노력은 자유민주주의에 자유주의가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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