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치노 안토니오 로시니 - 윌리엄텔 서곡 William Tell Overture
Part 1
Part 2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요리책 속에 '로시니풍'이라는 식단표를 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로시니는 음식맛에 정통한 사람 혹은 미식가로 꽤 알려져 있어 19세기 요리책에 수백 개나 되는 로시니풍의 식단표가 등장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로시니풍 삶은 달걀'이란 버터를 발라 살짝 튀긴 푸아그라(거위나 오리의 간으로 만든 프랑스 요리)를 얇게 썬 것과 버터로 데운 트뤼프(송이버섯)를 얇게 썬 것을 삶은 달걀에 함께 담아서 그 위에 마데이라 술을 넣은 드미글라스 소스를 뿌린 것을 말한다.
푸아그라, 트뤼프(로시니는 트뤼프를 '버섯의 모짜르트'라고 불렀다) 등 세계 3대 진미와 버터를 듬뿍 사용한 식단은 로시니풍 메뉴이 특징이다. 이런 고칼로리, 고지방의 식생활은 몸에 좋을 리가 없어 중년 이후의 그는 배가 불룩 튀어나왔고 관절염으로 고통받았다.
그러나 미식은 그가 사는 보람이요, 위안이기도 했다. 산지나 특정 가게에서 식품 재료를 직접 사들여서는 자택에서 호화로운 만찬회를 열기도 했다. 그 멤버는 스탕달과 발자크, 하이네 등의 문호와 시인도 초대 대상에 포함되고 있어 숱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런 로시니가 처음으로 파리를 찾은 것은 1823년 31살 때였다. 그 무렵의 파리는 '뚱뚱보 왕'이라고 부르던 루이 18세가 통치하는 왕정복고의 시대였다. 왕도 미식가로 알려져 파리는 미식의 도시로서 번영하고 있었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5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1829년에 초연된 다섯 번째 작품이 '윌리엄 텔'이다. 이 중 서곡은 음악시간에는 물론 운동회에서도 친숙한 곡이다.
윌리엄 텔은 4시간 가까운 긴 상연시간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전막을 상연하는 일은 드물고 서곡만이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서곡은 자연을 묘사한 '새벽' '폭풍' '목가' '스위스군의 행진' 등 네부분으로 돼 있다.
1부<새벽>은 안단테, e단조, 3/4박자. 곡은 첼로의 독주로 시작하고, 이 후 첼로의 5중주를 주체로 하여 스위스의 새벽을 조용히 묘사한다.
2부<폭풍우>는 알레그로, 2/2박자로 바뀌어 처음에 현으로 폭풍우의 내습을 알리는 질풍의 묘사가 있고, 이윽고 전악기에 의해 폭풍우가 몰아친다. 격렬한 폭풍우가 차차 멀어지고 팀파니에 의한 천둥소리가 멀리 들리며 플루트가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조용히 독주하는 가운데 다음 부분으로 옮겨진다.
3부<고요함/목가>는 다시 안단테, G장조, 3/8박자. 폭풍우가 가라 앉은 뒤 평화로운 목가가 불려진다. 전원에 울려퍼지는 목자의 아름다운 피리의 선율은 잉글리쉬 혼에 의해 연주되고 이 선율에 따라서 플루트가 장식적인 오블리가토를 부르는데 이 것은 스위스에 찾아든 평화의 정경을 상징한다.
마지막 4부<스위스군 행진>은 알레그로 비바체, E장조, 2/4박자. 스위스에 평화를 가져온 군인의 행진과 민중의 끝없이 환호하는 정경을 묘시한 것이다. 트럼펫의 힘찬 독주에 이끌려 관악기가 서주를 연주하면 화려한 리듬으로 행진곡이 시작되고, 중간부에서는 주로 목관이 노래하며 다시 행진곡으로 돌아와 클라이막스가 되어 흥분과 환희가 넘치는 코다로 끝을 맺게 된다.
이듬해 파리에는 혁명의 폭풍이 불어 닥치고 부르봉 왕조는 몰락한다. 그리고 로시니도 두 번 다시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 없이 37세로 사실상 은퇴한다. 그 후 40년 이상을 미식 생활로 시간을 보낸 그는 만년에 자택에서 개최한 '토요일의 만찬과 음악의 밤'에서 '로맨틱한 기계로 간 고기'와 같은 식품을 표제로 한 피아노곡이 요리와 함께 연주되었다고 한다.
조아치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이탈리아 작곡가. 페자로에서 가난한 트럼펫 연주자인 아버지와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 소질이 있던 그는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15살 때부터는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서 자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목소리가 상하게 되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됐다. 음악적으로 뛰어난 로시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처음엔 반주자로,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특기인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다.
1804년 온 가족이 볼로냐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종교음악의 작곡에 뛰어난 안토니오 테제이 밑에서 정식으로 작곡공부를 하고 1806년 볼로냐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첼로·피아노·작곡 등을 배웠다.
재학 중에 발표한 칸타타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통곡'으로 상을 받고, 1810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어음'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813년에 상연한 '탕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가 모두 호평을 받고, 1816년 로마에서 공연한 '세비야의 이발사'가 절찬을 받아 이때부터 그는 일류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오셀로'(1816, 나폴리) '도둑까치'(1817, 밀라노) 등도 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1822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로시니 선풍을 일으켰으며, 1823년에는 런던을 방문, 영국왕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824년 파리로 건너가서는 이탈리아오페라극장의 감독을 맡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금과 보수를 받고 작곡에 종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이밖에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815, 나폴리) '신데렐라'(1817, 나폴리) '이집트의 모세'(1818, 나폴리) 등과 파리에서의 작품 '오리백작'(1828) '빌헬름 텔'(1829) 등이 있다.
1836년 볼로냐로 돌아와 음악학교 교장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848년 피렌체로 옮겨 잠시 지낸 후 1855년 다시 파리로 건너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만년에는 요리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38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피아노곡·관현악곡·가곡·실내악곡(현악4중주곡 등)·성악곡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작곡을 한 그는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이탈리아 고전오페라의 최후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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