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so sprach Zarathustra Op.30)
1896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철학서에 감명받아 그의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의 교향시로 판타지 형태에 용해시켜 그의 작품 30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만들어졌다.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리스트가 이룩한 교향시라는 음악 형식과 바그너의 표현 수법을 융합하여 뛰어난 교향시적 표제음악을 많이 남겼다.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전작품을 대표할 정도로 손꼽히는 명곡으로서 각 연주회의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다.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처음엔 조용하고 낮은 C音으로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벽이 다가옴을 나타내는 장중한 자연의 주제가 트럼펫에 실려 시작되다가 재현부에서는 스케일이 큰 관현악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음악구성
제 1곡 Einleitung/sunrise
제 2곡 Von der Hinterweltlern /후세 사람들에 대해
제 3곡 Von der grossen Sehnsucht /크나큰 동경에 대하여
제 4곡 Von der Freuden und Leidenschaften/ 환희와 정열에 대하여
제 5곡 Das Grablide/무덤의 노래
제 6곡 Von der Wissenschaft /학문(과학)에 대하여
제 7곡 Der Genesende /평온한 자
제 8곡 Das Tanzlied /무도의 노래
제 9곡 Das Nachtwandler lied /몽유병자의 노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적이며 매우 시적인 문장으로 되어 있다. 수도자인 짜라투스트라가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며 산에서 내려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쓴 '짜라투스트라의 서설'과 인간에 관한 여러가지 일들, 즉, 기쁨, 전쟁, 사랑, 죽음, 괴로움 등의 약 80개의 제목을 가진 다양한 내용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트라우스는 이 곡을 만들면서 악보 서두에 니체의 원저의 서문을 싣고 이를 표제로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때까지 철학을 음악화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향시(Symphonic Poem)
음악으로서 풍경, 인물, 전설 혹은 시적인 상념 등을 그리려 하는 표제음악을 교향시라고 한다. 교향시에는 바람소리, 물결소리 등을 음악적으로 그린 직접 묘사가 사용되며 또한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그 의미를 연상할 수 있을 것 같은 민요라든가, 어떤 사람의 작품의 일부에서 그 사람을 생각케 하는 간접 묘사의 수법도 사용된다.
교향시는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케스트라는 독주곡에 비해 표제음악적인 묘사를 더하기 때문에 그 표현범위가 넓고, 색채와 명암의 느낌 등을 웅변으로 말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 복잡한 내용도 표현할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 뮌헨-1949 가르미슈)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아버지 프란츠 Franz는 뮌헨 궁정관현악단에 소속된 유명한 호른 주자였다. 음악의 기초를 가족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삼촌으로부터 바이올린을으로부터 배운 후에 마이어 F. W. Meyer의 밑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젊었을 때에 작곡한 그의 최초의 작품에는 멘델스존과 슈만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1889년 바이마르에서 궁정악장이 되었다. 중병으로 인하여 활동을 수개월 동안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쾌유되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그곳에서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의 초고를 작성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매우 강한 이 작품은 1894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두 번째 오페라 화난(火難)은 바그너를 향한 새로운 회귀를 나타내는데, 이번에는 1901년 드레스덴에서의 공연이 성공을 거두어 그의 희망에 부응했다. 그의 처음 두 편의 오페라가 자신의 대본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05년 스캔들을 야기시켰다고는 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살로메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이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가 프랑스어로 쓴 매우 대담한 희곡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이후 슈트라우스는 후반생의 거의 전부를 극장음악에 바쳤으며 이 분야에서 20세기 전반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가 되었다. 엘렉트라에서 그는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비극을 다룸으로써 전설적 리얼리즘의 흐름을 프로이드를 거쳐 그 이전까지도 추구했다.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자신의 관심사를 더욱 깊이있게 했다고 확신한 호프만스탈은 남은 30년간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위하여 대본을 쓰는 일에 바쳤다. 이 사실은 이 작곡가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오페라에는 없었던 강한 힘을 엘렉트라에서 달성해 버린 슈트라우스는 장미의 기사에서 놀랄 만한 방향전환을 했다.
1919년 빈의 국립 가극장 예술감독에 임명된 그는 취임 때 호프만스탈의 대본에 의한 그림자 없는 여인을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상징주의적 형이상학적 관심에 의하여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밖에 빈풍 발레 거품나는 크림과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모험에서 착상을 얻은 부르주아 희극인 인테르메쪼도 들어두어야겠다. 인테르메쪼는 본래 가수였던 그의 아내 파울리네 드 아나 Pauline de Ahna와 함께 상연했다. 1925년 슈트라우스는 빈 가극장을 떠났고, 오페라 이집트의 헬레나를 작곡했으나 이것은 그의 원숙기의 가장 잘못된 작품이 되었다. 또 모짜르트의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를 개작했다.
1933년 장미의 기사의 빈양식을 다시 교묘하게 도입시킨 아라벨라에서 명예를 회복했는데, 이것은 1929년에 사망한 호프만스탈이 그를 위하여 쓴 최후의 작품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스탈을 대신할 대본작가를 결국 찾아내지 못했고, 후기 오페라는 음악적으로는 틀림없이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스탈이 보여준 독특한 연극적 센스가 빠져 있다. 그러나 말없는 여인에 대해서는 이 평가가 반드시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최후의 오페라 카프리치오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80세에 가까이 되면서도 더욱 자신을 고무했다. 친구인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와 공동제작한 대본을 기초로 하여 작곡한 이 작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평생을 통하여 몇 차례 경의를 표한 프랑스문화에 대한 마지막 경의가 되었다.
오페라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음악인가, 언어인가? 해답은 양자의 완전한 밸런스이다. 이것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장이고 그 훌륭한 성과야말로 그의 말년의 주요한 극작품이 된 카프리치오이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945년에 23개의 현악기를 위한 에튀드 메타모르포젠을 작곡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의 평생의 최고 걸작인 동시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에 의하여 낭만주의에 의식적으로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1949년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수개월 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최후의 4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은 그를 충분히 만족시킨 일생에 다시없이 아름다운 고별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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