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Peter Schubert - 미완성교향곡 [Unvollendete Symphonie]
Schubert - Symphony n.8 Unfinished [1/3]
Schubert - Symphony n.8 Unfinished [2/3]
Schubert - Symphony n.8 Unfinished [3/3]
슈베르트의 생애는 비록 짧았으나 그사이에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그가 오스트리아로 여행도중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가스타인 교향곡"은 완전히 분실되었으며, 한 곡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유작이어서 완전한 것은 7곡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저 방대한 제7교향곡과 제8번 "미완성"교향곡으로 이 2곡만으로도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의 이름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8번 "미완성"은 인기면에서 베토벤의 "운명"과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 슈베르트의 교향곡 중 최고의 걸작으로 널리 사랑 받고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위대한 교향곡의 실연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완성"이란 부제로 더욱 유명한 이 곡은 슈베르트가 25세 때 작곡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연주되지 못하다가 초연된 것은 슈베르트의 사후 37년 만이었다. 보통 교향곡은 4악장으로만 이루어지는데 이 곡은 2악장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완성"이라 한다.
교향곡 제6을 쓰고 잠시 교향곡의 창작에서 손을 뗀 슈베르트는 5년간의 침묵을 깨뜨리고 이 b단조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연대순으로 보면 현재의 제7보다 6년 앞서 작곡된 것으로, 순서상으로 볼 때, 이것이 제7교향곡에 해당되겠지만, 슈베르트는 처음의 두 악장만 쓰고 제3악장 스케르쪼는 1페이지의 총보와 트리오의 절반까지 써놓고 미완성 그대로 방치하였다.
1823년 슈베르트가 시타이에마르크음악협회 명예협회으로 추천되었을 때 그는 그 감사의 표시로 이 협회의 소개지인 그라츠에 있는 친구 피텐브렌나에게 이 2악장의 교향곡을 보냈는데, 1865년 빈의 궁정지휘자 헤르베르크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40년 이상이나 먼지 속에 묻혀있었다. 슈베르트가 어찌하여 미완성인 채로 방치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슈베르트가 어찌하여 2악장밖에 쓰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지만 2악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도중에 마무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악장
비교적 간단한 소나타형식으로 첼로와 베이스의 유니즌에 의한 신비적인 도입주제는 조용하게 최약주로 개시되면서 점점 상승해온다. 이어서 바이올린의 섬세한 반주와 저음현의 피치카토를 배경으로 목관이 애수어린 제1주제를 제시하게된다. 이 주제의 로맨틱한 느낌은 호른에 의한 반향적 효과에 의해서 현저히 강화된다.
주제가 거듭된 후, 파곳과 호른의 짧은 경과부 뒤에 침착하고 향취있는 빈의 렌틀러풍 제2주제가 첼로의 주주로 G장조에 나타나며, 베이스의 피치카토와 바이올린의 당김음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율동으로 이것을 반주한다. 첫머리의 도입선율의 최초동기를 중심 소재로 하는 전개부에서는 제2주제의 배경으로 쓰여진 당김음과 그외에 한둘의 다른 악상에 더해지고, 격식대로 쓰여진 재현부를 거쳐서 낭만적인 여운을 남기면서 종지를 고한다.
2악장
제 1악장처럼 조용한 콘트라베이스의 피치카토에 반주되는 2마디의 파곳과 호른의 도입에 의해 감동에찬 아름다운 주제가 높은 음역에서 바이올린의 주주로 나타난다.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를 활용한 이 악장은 명확한 형식성보다도 가요적인 성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제는 유려하면서도 소박하고 친밀감이 있다. 대체로 슈베르트의 음악에서는 서민적인 소박함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일반 시민 생활 속에서 활동한 사실과 결부되는 것이다.
이상의 악상이 첼로의 효과적인 대위선율을 수반한 채 조바꿈하면서 반복된다. 다음에는 제1바이올린의 단음진행이 남게되고 이어서 자잘하게 떨리는 현의 반주를 타고 클라리넷이 아름답고 애절한 제2주제를 연주한다. 이것이 악기를 바꾸어 반복 전개되어서 제시부를 끝낸다. 전개부와 재현부를 거친 뒤 코다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는 이미 나온 주제가 잇따라 극적으로 전개되어서 제2의 전개부를 연상시키고 곡상이 다시 고조된 뒤 인상적인 피치카토를 더듬어 팀파니의 트레몰로를 수반한 조용한 화성에 도달한 뒤 꺼지듯이 끝난다.
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1797~1828)
오스트리아 리히텐탈(빈) 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를 경영하고, 어머니는 장인(匠人)의 딸이었다.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 때 교회의 합창지도자들로부터 가창·바이올린·피아노·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 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寄宿神學校)에 들어갔다. 여기서 궁정 오르간 주자 루치카, 궁정악장 A.살리에리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6세 때 1년 과정의 교원양성학교에 다닌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학교의 저학년 수업을 담임하기도 하였다.
1818년 여름 헝가리의 P.A.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하계(夏季) 음악교사로 초빙된 것을 기회로 그는 집에서 나와 그 후로는 빈 시내의 친구들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보헤미안생활을 보내면서 작곡을 계속하였다. 1824년 여름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가정교사로 초빙을 받았는데, 슈베르트는 그 후로는 공직을 맡은 적이 없었으며, 아내도 가정도 없이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전년에 작고한 벨링크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 묻혔으며, 88년 두 묘는 빈의 지멜링크 중앙묘지로 옮겨졌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였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으며 그 곳에서 음악활동을 하였으므로 베토벤과 비교해 보면 슈베르트의 작풍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베토벤은 음악을 계시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민(選民)으로 자처하였다. 이것은 당시 독일 유식계급의 눈에 비친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초기 활동의 지도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이와 같은 선민의식을 갖지 않았고, 스스로 즐기며 타인도 즐겁게 하려고 작곡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빈고전파의 작곡가들과 같이 오페라·실내악·피아노곡·교회음악·가곡 등, 협주곡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걸쳐 있고 작품량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극히 많은 셈이다. 오토 에리히 도이츠의 연대순으로 정리된 작품번호(D.로 약기)에 따르면, 작품수는 998개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약 633곡의 가곡이며, 이전의 고전파시대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예술부문이 슈베르트에 의하여 아름다운 선율과 색채에 넘치는 화성(和聲)에 힘입어 비로소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취급된 점이다.
W.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Die scho ne Mullerin》(작품 25·D. 795·1823·전20곡), 《겨울나그네 Die Winterreise》(작품 89·D. 911·1827·전24곡), 교향곡으로는 《미완성교향곡》 B단조 제8번(D. 759·1823), 《교향곡 제9번》 C장조 (D. 944·1828:종래에는 제7, 또는 제10이라고도 하였음), 실내악으로는 현악4중주곡 D단조 《죽음과 소녀》(D. 810·1824), 피아노5중주곡 A장조 《송어 Die Forelle》(D. 667·1819), 피아노곡으로는 8곡의 《즉흥곡 Impromptus》, 6곡의 《악흥(樂興)의 때 Moments Musicaux》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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