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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3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9. 2. 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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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3

 

2.2. 흰 지배자와 검은 노예들

 

미지의 땅이었던 지금의 북아메리카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다. 드넓은 토지에 유럽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교역의 축으로서 그곳은 매력이 넘치는 ‘신대륙’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수도인 워싱턴과 인접한 버지니아 지역에서 금을 찾거나 담배나 면화를 재배하면서 원주민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필그림들(Pilgrims), 청교도들(Puritans)

그런데 돈 벌기에 혈안이 된 그들과는 달리 종교적 목적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영국의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매사추세츠 지역을 개발하면서 장차 미국을 지배할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쌓아가고 있었다.

 

   물론 영국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해안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초부터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해안에 도착해서 인디언 부족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1620년경에 플리머스(Plymouth)에 소위 필그림들(Pilgrims)이 도착해서 하나의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필그림 교도들은 청교도들과는 달리 소박한 신교도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개종시키기보다는 그러한 세상과 분리되어 그들만의 순수하고 단순한 삶을 살려는 자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은 1608년 에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도시가 너무 상업적으로 발달해서 타락해 있음을 보고 결국 1620년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최중·김봉중 함께 쓰고 수정 보완함, <한국인이면 꼭 짚어야 할 미국의 역사>[이하 <미국의 역사>], 1992년 3월, 조합공동체 소나무, 43쪽)

 

1620년 11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9주간 고난의 항해를 한 끝에 지금 미국 동해안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이 필그림들이 미국을 지배할 와스프의 선조였던 것이다. 1630년 3월에는 청교도 1천여 명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고, 그 이래 10년 동안 1만8천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새 예루살렘에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이 요구하는 지상 낙원을 위해서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선민의식과 타락한 세상을 개혁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식은 앞으로 미국이 성장하면서 항상 미국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사상이며, 특히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들과 접촉할 때 이러한 사상은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그들이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들과 접촉하였을 때 청교도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는 책임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인디언 선교 희망이 인디언들의 독특한 생활환경과 사회여건으로 무산되자 이제는 무력으로 인디언들의 땅을 점령하였다. (위의 책, 48~49쪽)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인디언’을 ‘흑인’이나 19세기 후반의 ‘조선인’으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가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순수한 선교 목적을 벗어나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앞장에 선 역사,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필그림들이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상륙한 1621년 초보다 16개월쯤 앞선 “1619년 8월 하순 어느 날, 적어도 세 명의 여자를 포함한 20명의 흑인을 실은 한 척의 범선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상륙했다. 체사피크만 근해로 들어온 사략선인 이 배의 출현은 우연적이어서 확실히 그 결과가 미친 오랜 영향만큼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새로운 한 인종이 제임스타운 발견 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개척지로 들어온 것이다. (벤자민 콸스 지음, 조성훈 이미숙 옮김, <미국 흑인사>, 2002년 12월, 백산서당, 39쪽) 


  (* 1940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벤자민 콸스(Benjamin Quarles)가 쓴><미국 흑인사>(The Negro in the Making of America)는 본격적인 미국 흑인사 연구서로서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터치스톤 북스(Touchstone Books)의 1996년판을 번역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이 분야의 개설서이다.)


‘계약제 하인’ 대신 흑인노예들

제임스타운에 부려진 흑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제 하인’이 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약제 하인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신대륙’에서 노동자로서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유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들이 필연적으로 눈길을 돌린 쪽이 흑인 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8세기 초부터 아랍인들과 무어족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하라사막을 통해 지중해 국가들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 뒤에 노예무역을 본격화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나중에 그곳이 인도가 아님이 밝혀진 뒤 ‘서쪽에 있는 인도’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에 상륙한 이래 개척된 중남미 지역의 대농장들에 흑인 노예들을 ‘공급’했다.

 

  영국은 1663년에 찰스 2세가 왕실 모험단 회사(Royal Adventurers)에 특허장을 줌으로써 뒤늦게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참가하게 되었다. 17세기말 까지는 영국은 네덜란드와는 비교되지 않는 소규모의 노예무역을 하였으나 북미 대륙에서의 그들의 식민지 발달과 해상세력의 성장으로 18세기말 경에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노예무역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윽고 18세기 내내 영국은 적어도 6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역사>, 25~26쪽)

 

영국이 한 세기 동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한 흑인 노예가 ‘적어도 6백만 명’이었다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선적’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리고 1865년 남북전쟁의 결과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미국 땅으로 팔려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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