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1960년대에 들어서자 미국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1917~1963)가 43살의 젊은 나이로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그 바람의 진원지였다. 와스프의 본거지인 매서추세츠주에서 조셉 케네디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와스프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백인의 후예로, 양조업으로 큰 재산을 모아 주영 미국대사를 지낸 ‘명사’였지만 천주교도라서 와스프라고 볼 수 없었다. 자료를 보면 존 F. 케네디가 보스턴 와스프의 핵심 인물들이 사는 비컨힐의 파티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은 1953년 1월에 연방 상원의원이 된 뒤부터라고 하니 그곳에서 얼마나 괄시를 받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변화의 바람, 케네디의 등장
케네디는 개신교도가 아니라는 것 말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미국의 상류계층이자 엘리트였다. 그는 아이비리그의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해서 단 6주간 다니다가 병으로 입원하고 나서 하버드대에 신입생으로 들어갔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서부의 명문인 스탠포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기까지 했으니 보통 미국인들이 보면 ‘부자집 아들에, 미남에, 진취적인 정치적 성향까지 지닌’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장남인 조셉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첫 아들의 죽음으로 무산되자 차남에게 갖은 공을 들였다. 결국 아버지의 꿈은 실현되었으나 아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케네디가 미국의 ‘전국적 정치인’으로 부각된 과정은 버락 오바마와는 상당히 달랐다. 그는 30세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고, 36세에 상원의원으로 초고속 상승을 했지만 정작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56년의 대통령선거 때였다. 민주당 후보인 애들라이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에 출마했으나 테네시주 상원의원에게 뒤져서 2위에 그쳤다. 그렇게 패배했지만 케네디는 다음 단계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그때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별칭)를 나온 직업군인으로 세계 2차 대전의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지적으로나 정치적 식견에서 크게 앞선 스티븐슨을 눌렀다. 부통령이 된 사람은 나중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치적 파탄을 맞은 리차드 닉슨이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2차 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이 추구해온 냉전정책을 계속 강화했다. 케네디는 1957년에 ‘민권법안’(Civil Rights Act)이 상원을 통과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진보적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공화당 정권이 미국의 최상위 이데올로기로 다져놓은 ‘반공’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첫 번째로 일으킨 사건은 쿠바의 ‘피그만 침공’이었다. 1959년 2월에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혁명이 친미 독재의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자 미국은 ‘엉덩이 바로 밑의 급소’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에 경악했다. 운이 나쁜 것인지, 쿠바 혁명정권을 제압하고 ‘미국을 빨갱이들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지켜야 하는 짐이 새 대통령 케네디에게 떨어졌다.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중 중앙정보국(CIA)이 만든 ‘쿠바 침공작전 계획’을 확대해서, 1961년 4월 17일 미국이 훈련한 쿠바 망명자 1천5백 명을 피그만에 침투시켰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석 달이 채 안 되던 때였다. 결과는 참패였다. 4월 19일 쿠바 정부가 침입자들을 사로잡거나 죽였던 것이다. 케네디는 포로 1,189명을 석방하려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는 그 뒤 1962년 10월에 소련 총리 흐루시초프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데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강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미국 사회는 젊은 대통령 케네디가 내세운 구호인 ‘뉴 프론티어’(New Frontier, 새로운 개척자라는 뜻)에 따라 참신한 변화를 겪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살해하고 땅을 빼앗으면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쳐들어가서 마침내 오늘의 합중국 영토를 ‘이룬’ 무법자들과 선의의 개척자들을 아우르는 말이지만, 어쨌든 다수 미국인들은 케네디의 정치적 홍보에 열광했다.
케네디 시절, 흑인운동의 커다란 진전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미국의 흑인운동은 두드러진 발전 단계로 들어섰다. 우리는 여기서 그보다 7년 전인 1954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 판결이 흑인운동의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때 대법원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공립학교의 인종 격리는 위헌이라고 판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교들이, 특히 남부 여러 주들에서 대법원의 판결에 불복해서 버스, 식당, 영화관, 화장실 같은 곳들의 인종 차별이 계속되었다. 인종 통합과 민권을 지지하던 케네디는 1960년의 대선 유세 기간에, 감옥에 갇혀 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부인 코레타 스콧 킹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것이 그가 흑인들의 지지를 얼마쯤 더 받도록 한 것 같았다고 한다. 케네디와 그의 동생 로버트의 개입으로 킹은 일찍 석방될 수 있었다.
1962년에 제임스 메레디스가 미시시피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인 학생들의 방해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케네디는 연방 보안관 4백여 명과 군인 3천명을 보내서 메레디스가 첫 학기에 등록하도록 했다. 애초에 대통령으로서 케네디는 민권을 위한 민초들의 운동이 남부의 많은 백인들을 성나게 할 뿐 아니라 민권법안들이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이 지배하는 하원을 통과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그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많은 민권 지도자들은 케네디가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1963년 6월 11일 케네디 대통령은, 앨라바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을 가리킴)인 두 학생이 앨라배마대학교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정문을 막자 개입을 했다. 연방보안관들과 앨라배마주 방위군이 닥치자 월러스는 비켜섰다. 그날 저녁 케네디는 전국에 나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그 유명한 민권 연설을 했다. 케네디는 1964년에 민권법으로 제정될 내용을 그때 제안했던 것이다. (<위키피디아>, ‘존 F. 케네디’ 항목에서)
그러나 이렇게 혁신적인 정책을 실행한 케네디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던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수많은 개인들을 연방수사국(FBI)이 도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도청은 나중에 킹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나타난다) 린든 존슨(케네디의 후임 대통령)은 1967년 ‘새해 의회 연설’에서 과거(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염탐질과 도청에 관해서 말했다. 비록 존슨도 킹을 계속 도청했지만.
1. 말콤 엑스와 버락 오바마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획기적으로 성장한 흑인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는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2세였다. 모두 암살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두 사람의 운동 노선과 이념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는 이 책을 쓰려고 여러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넘는 말콤 엑스와 킹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아직도 활발함을 보고 놀랐다. 킹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1960년대 초를 전후로 미국과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말콤 엑스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웹사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오늘의 미국, 특히 흑인들의 현실과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두 지도자를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오바마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정반대 성향도 강한 말콤 엑스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행복하게 사는 법 (0) | 2009.02.11 |
---|---|
오바마시대와 한국 6 (0) | 2009.02.10 |
오바마시대와 한국 4 (0) | 2009.02.02 |
오바마시대와 한국 3 (0) | 2009.02.02 |
오바마시대와 한국 2 (0) | 2009.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