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미국의 컨설팅사 부즈앨런&해밀턴은 '한국보고서-21세기를 향한 한국경제의 재도약'에서 당시 한국 상황을 넛크래커(호두 까는 기계)에 비유했다. "한국이 '비용의 중국'과 '효율의 일본'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마치 넛크래커 속에 낀 호두가 됐다"는 진단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는 다시 위기다.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 탓만은 아니다. 넛크래커에서 샌드위치로 표현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당시보다 더 악화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 비해 기술과 품질이 뒤지고,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후발 개발도상국에 비해선 가격 면에서 뒤쳐진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급속히 늙어버린 경제구조에 연 평균 6%를 넘나 드는 초고속 성장도 이젠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을 대신할 새로운 성장동력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기회 삼아 샌드위치를 탈피하고 한 단계 도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초라한 경쟁력 순위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55개 평가 대상 국가 중 중간에도 못 미치는 31위에 머물렀다. 29위(2005년)→32위(2006년)→29위(2007년)→31위(2008년) 등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좀처럼 중ㆍ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세계 13위 경제대국의 성적표 치고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물론, 순위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실제 세계경제포럼(WEF) 순위에선 한국이 지난해 13위를 기록하는 등 조사기관마다 편차가 상당한 것이 현실이다. 최근 국가 부도를 선언한 아이슬란드가 2007년 IMD 순위에서 7위에 오른 것만 봐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종합 순위를 떠나 선진국들은 전 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 고른 역량을 보인다는 점이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IMD 국가경쟁력 지수, 안홀트 국가브랜드 평가(2007년), 영국 신경제학재단(NEF) 행복지수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미국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들은 전 분야에 걸쳐 일정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영국) 무역수지(캐나다) 관광수입ㆍ외국인투자(스웨덴) 정도를 제외하면 이들 국가들은 20개 핵심 분야에서 30위권 아래로 떨어진 분야가 거의 없다. 전 과목을 다 100점을 맞지는 못해도 낙제점을 받는 과목은 없어야 우등생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IMD 순위만 봐도 50위 이하 최하위권 평가를 받은 분야가 가격 통제(53위) 기술 규제(55위) 외국인 직접투자(54위) 문화적 개방성(55위) 등 10여개에 달하는 우리나라로선 여전히 높고 멀기만 하다.
선진국들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국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확실한 '장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덴마크는 사회 안정성, 해외 이미지, 기업 윤리경영, 교육 등 8개 분야에서 세계 5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미국ㆍ스위스(6개) 스웨덴ㆍ독일(5개) 영국ㆍ일본ㆍ프랑스(2개) 캐나다(1개) 등의 순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개 핵심 분야 중 단 한 분야도 5위권 내에 들지 못했다.
소프트파워가 관건이다눈 여겨 볼 대목은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격차를 보이는 분야가 대부분 사회 안정성, 해외 이미지, 기업 윤리경영, 정부 투명성 같은 무형의 소프트파워(Soft Power)라는 점이다. 압축 성장으로 경제 규모나 기술, 사회간접자본(SOC) 등은 선진국 수준을 턱 밑까지 추격했지만, 그에 걸맞은 사회적, 문화적 시스템이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그래서 심지어 '졸부 국가'라는 혹평까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 브랜드다. 안홀트 GMI의 지난해 국가 브랜드 평가에서 우리나라의 국가 브랜드 순위는 50개국 중 33위에 불과했다. 특히 2007년 조사에선 우리나라의 국가 브랜드 가치가 국내총생산(GDP)의 29%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224%)이나 네덜란드(145%) 미국(143%) 등과 비교하면 경제력에 비해 현격히 저평가돼 있는 셈이다.
국내 인재들의 해외 유출도 갈수록 늘고 있다. 한때 대표적인 인재 유출국이었던 인도의 경우 1995년 10명의 인재 중 3명만 국내 잔류 의사를 보였지만, 2006년 조사에서는 6.8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같은 기간 국내에 잔류하겠다는 인재가 7.5명에서 4.9명으로 줄어들었다.
교육 역시 눈에 보이는 성적과 달리 보이지 않는 부분에선 선진국과 상당한 격차가 발견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 학업성취도평가(PISAㆍ2003년)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에서 기록한 성적은 세계 3위. 하지만 학습에 대한 흥미(31위)와 학습동기(38위)는 하위권을 맴돌았다. 학생들의 좋은 성적이 창의적 인재 육성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뿐이 아니다. OECD의 2004년 조사에서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답한 국민은 45%. 미국이 77%에 달하고 OECD 평균이 69%인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장애인 실업률(OECDㆍ2005년)도 24%에 달해 미국(5%) 영국(12%) 프랑스(18%) 등과 비교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현저히 부족했다. 이상빈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선진국과의 격차를 해소하려면 단순히 경제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파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