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생활수급제 10년] 빈곤층 느는데 수급자 감소 ‘기현상’
<국민일보쿠키뉴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1999년 단순 시혜적 차원의 생계지원에서 벗어나 저소득층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자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소득과 부양가족이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에서 핵심 기준이다.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했을 때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면 지원받는다. 부양이 가능한 가족이 있으면 지원이 힘들다. 애초 자활사업 실시로 빈곤층의 자립을 돕겠다는 목표는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됐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회 안전망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원인과 실태, 대안을 살펴본다.
지난 13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경기도 A시 한 임대주택, 조상득(45·가명)씨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날 꼭 건설 현장에 나가 일당 4만원을 벌어야 했다. 그래야 저녁 먹을 쌀을 사고 딸들에게 차비를 줄 수 있다.
건설 일용직인 조씨는 지난 겨울 일을 거의 못했다. 12월부터 따져봐도 일한 날이 10일이 안 된다. 인력업체는 경기 탓이라고 했다. 2007년 겨울에는 세 딸 밥을 굶길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해 9월부터 임대주택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30㎡ 남짓한 집의 월세는 1만3000원이다. 수도 요금까지 합해 14만원이 연체됐다. 소유주인 대한주택공사가 월세 납부를 재촉하는 공지를 지난 12일 조씨 집 현관 문앞에 붙였다.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11만5000원을 갚았다. 이제 2만5000원만 더 갚으면 된다며 웃었지만 고개는 방바닥을 향했다.
큰 딸은 지난해 고등학교를 그만 뒀다. 조씨는 “차비 몇번 못줬다”며 자세한 얘기를 피했다. 낮 동안 큰 딸은 집에 없었다.
조씨는 최근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5년전 명의를 빌려준 1993년식 갤로퍼 차량이 걸림돌이 됐다. 주민센터 사회복지사는 “배기량 2000㏄가 넘는 차량이 있으면 매달 차 평가액 만큼 소득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정부 기록에 그의 월소득은 200만원이다. 조씨는 폐차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매월 최소 1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주인이 내지 않은 자동차세와 벌금 180여만원이 거머리처럼 붙어 있다. 눈 앞에 희망의 문이 있지만 그의 발은 깊은 수렁에 묶여 있다.
시행 10년째를 맞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곳곳에서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조씨처럼 하루 하루 숨막히는 삶을 살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 때문에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빈곤층이 상당수다. 반면 제도 허점을 이용해 더 어려운 사람이 받아야 할 지원을 가로채는 사람도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1999년 9월 법이 제정돼 2000년 10월부터 실시됐다. 빈곤층에게 기초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고 자립을 돕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현재 전국 기초생활수급자는 153만6043명으로 지난해 1월 155만2966명보다 1만6923명이 줄었다. 허술한 제도 탓에 신빈곤층이 증가하는데도 기초생활수급자가 줄어드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기초생활보장제도 사각지대에 160만여명이 있다고 파악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앞으로 증가할 신빈곤층을 더하면 사각지대에 방치된 인구는 300만∼400만명까지 늘 것으로 본다.
[기초생활수급제 10년] 수급자 왜 줄었나
기초생활수급자는 지난해 1월 155만2966명에서 12월 152만9939명으로 줄었다. 경제 위기가 깊어진 하반기에 감소폭이 더 컸다. 왜 형편이 어려워진 사람은 늘고 있는데 기초생활수급자는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정호원 보건복지가족부 기초생활보장과장은 15일 “적정한 사람들에게만 급여가 돌아가도록 관리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되는 부정수급자를 걸러냈다는 뜻이다.
복지부는 지난해 10월 부정수급 예방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부정수급자가 해마다 45%씩 큰폭으로 늘어나는만큼 꼭 색출하겠다는 의지였다.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금융재산 조회 시스템을 도입해 수급자 본인을 비롯한 부양의무자 재산을 샅샅이 찾아냈다. 서울시 관계자는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아 몰랐던 재산이 드러나면서 수급자가 대거 탈락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수급자 월별 통계는 복지부의 이런 활동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경제위기에 따른 신빈곤층 구제 활동이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더 크다는 지적이 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정부가 부정수급자를 색출하는데 급급했을 뿐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진 신빈곤층 발굴에는 소홀했기 때문에 경제위기에도 기초생활수급자가 줄어들었다고 지적했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수급자가 줄어든 것은 합리적 개선의 측면도 있지만 위기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전문가들은 정부가 복지 정책에 미온적인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국회를 통과한 올해 기초생활 보장 관련 예산은 7조1000억원이다. 지난해 예산보다 2000억원 가량이 줄었다. 당시는 경제 위기로 기초생활수급자를 포함한 신빈곤층이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 빤히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지난 12일에야 기초생활수급자를 올 연말까지 7만명 더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기석 기자
[기초생활수급제 10년] 엉뚱한 선정기준,빈곤층 울린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실과 거리가 먼 선정 기준이다. 신빈곤층으로 전락한 상당수가 선정 기준을 맞추지 못해 사회 안전망 밖에서 시름하고 있다.
◇“차 있으세요?”=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주민센터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처음 듣는 말은 “차 있으세요?”다. 차가 있으면 선정되기 힘든 규정 때문이다. 경기도 평택시 이재희(57·여·가명)씨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씨는 관광지 근처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며 간단한 음식을 판다. 지체장애 3급인데다 수입이 적은 사실을 인정받아 2006년 7월 수급자가 됐다. 하지만 4개월 동안 들어오던 돈은 같은해 10월 갑자기 중단됐다. 이씨 명의를 빌린 지인이 중형차를 구입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수급자 선정 기준은 생업용이 아닌 승용차를 보유하면 매달 상당한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소득 환산율이 일반 재산은 월 4.17%, 금융 재산은 월 6.26%이지만 승용차는 월 100%에 이른다. 차를 평가한 값이 300만원이면 매월 소득 300만원이 있는 것으로 본다. 수급자가 되고 싶으면 차를 팔라는 얘기다.
현실적으로 해결이 힘든 명의 도용이나 명의 대여 경우가 있는데도 정부는 “공적 증빙서류가 꼭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의 도용, 대포 차량은 고소·고발장이나 도난 신고 확인서를 요구한다. 류정순 빈곤문제연구소장은 “승용차 명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수급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면서 “모르는 사람만 당하는 희한한 규정”이라고 지적했다.
◇인연 끊은 아들 때문에…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양가족 기준 만큼은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 지침은 자식이 젊고 건강하면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있다고 보고 수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하지만 꼼꼼히 조사하면 부모와 연락을 끊고 사는 자식이 상당수다.
이재희씨의 경우 장사가 안 되자 차 문제를 해결하고 지난달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으나 또 탈락했다. 이번에는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이 발목을 잡았다. 연락도 안된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근 컨테이너가 불법건축물이니 비우라는 당국 말에 오도가도 못할 처지다.
경기도 남양주 이영학(75·가명)씨는 2004년 2월 수급자가 됐다가 2년8개월만에 탈락했다. 아들 4명의 소득이 이씨를 부양할 만큼 늘었다는 판단이 이유다. 이씨는 노령연금으로 받는 월 8만4000원과 소일거리로 번 돈으로 겨우 산다.
◇집 팔려야 수급자 선정=팔리지 않는 재산 때문에 수급자 선정이 어려운 가정도 있다. 경기도 부천 임건익(46·가명)씨는 지물포를 운영하다 지난해 8월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장이 쓰러지자 가족 생계가 막막했다. 주민센터에서는 수급자가 되기 위해 집을 팔아야한다고 했다. 집을 내놨지만 이달까지 팔리지 않고 있다. 임씨는 “집을 팔아도 빚을 갚고 나면 또 빚이 남는다”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정부는 일정 가격 이상의 집이나 전셋집이 있으면 수급자 선정에서 제외한다. 대도시에서 보증금 5400만원이 넘는 전셋집이 있으면 재산이 어느정도 있다고 간주한다. 5400만원과 실제 전세금 사이 차액을 재산으로 보고 월 소득으로 환산한다. 중소도시는 3400만원, 농어촌은 2900만원이 기준이다. 이 기준은 그나마 최근 상향 조정됐다.
시민단체는 아직도 2∼3년 전 급격히 오른 집값, 전세값과 거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임씨 경우처럼 당장 팔거나 전세를 빼지 않으면 지원받기 힘든 점도 문제다.
◇신빈곤층 양산하는 규정=사회복지 전문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급자 선정 규정을 바꾸지 않고는 신빈곤층을 기초생활수급 제도로 떠안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여연대 등 진보 단체들은 수급자 선정의 핵심 기준인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해야 신빈곤층 구제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류정순 소장은 “4인 가구 평균 소득 대비 4인 가구 최저생계비 비율은 1998년 45%였으나 지난해 30.8%로 줄었다”고 강조했다. 다만 정부 지원에만 기대고 일을 하지 않는 빈곤층을 양산할 수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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