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린 채 탕! 228명 넘게 유해 드러나
[공주 유해발굴 중간설명회] 증언과 유해로 재현한 사건 현장
<오마이뉴스>
▲ 공주형무소 전경 (1960년 대)
▲ 1950년 당시 암매장지로 끌려가고 있는 학살직전 사진. 오른쪽 뒷쪽 헌병과 공주형무소 특경대원(오른쪽 앞쪽), 경찰로 보이는(왼쪽 앞쪽) 사람들이 총을 들고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영국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빨리빨리 나와! 얼른 나오란 말야!"
1950년 7월 어느 날, 오전 9시경이었다. 갑자기 공주형무소 감방문이 열렸다. 형무관(지금의 교도관)들이 수번을 부르며 밖으로 나올 것을 채근했다. 여기저기서 재소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더기로 밖으로 불려 나왔다. 대부분 형량을 채워 출소를 앞두고 있는 정치범이었다.
"왜 그런대유?"
"대전형무소로 이감이다. 얼른 얼른 도라꾸(트럭)에 타라! 입 다물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묻지 마라."
형무소 앞마당에는 '忠南 官用'(충남 관용)이라고 새겨진 트럭 한 대와 형무소 트럭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간 재소자들이 술렁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우선 대전형무소로 이감 간다면서 소지품을 챙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받은 편지며 사진, 옷가지들을 그대로 두고 맨몸으로 다른 형무소로 이감을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앞마당에는 형무소 특경대원 외에도 군 헌병과 경찰들이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이들은 총구 끝으로 재소자들을 마구 찌르고 머뭇거리는 재소자의 얼굴을 향해 개머리판을 휘둘렸다. 지체 장애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왼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한 재소자에게도 동작이 굼뜨다며 군홧발을 날렸다.
이들이 구겨지듯 트럭에 실리자 이번에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바닥에 숙이게 했다. 대기하고 있던 군 헌병과 경찰이 미처 고개를 숙이지 않은 재소자를 향해 총구를 내리찍었다.
"으악! 어이쿠!"
외마디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 특경대원이 이번에는 비명을 지른 재소자들에게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시끄럽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소자들은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전형무소로 이감 간다더니 구덩이 속으로 끌고 가
▲ 드러난 유해
▲ 돌덩이에 짓눌려 있는 희생자 유해. 가운데 둥근 형태는 희생자의 두개골이다.
짐칸이 꽉 차자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략 한 대에 30~40명의 재소자가 실렸다. 대부분 20대 이상으로 보였다. 육중한 형무소 철문이 열렸다가 트럭이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곧 닫혔다. 트럭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소총을 든 형무소 특경대원과 군 헌병, 경찰 등이 "고개를 들지 말라"고 위협했다.
트럭은 공주읍내를 지나 대전으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재소자들은 트럭이 가는 방향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제발 약속대로 '대전형무소'로 가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트럭이 멈춰 섰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로변에 미리 늘어선 경찰들이었다. 재소자들은 철벅거리는 군홧발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구령소리로 이들이 군인 또는 경찰임을 직감했다.
"내려! 누가 고개 들으라고 했어!"
트럭에서 내린 재소자들은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일렬로 늘어선 채 산으로 향했다. 이들을 내려놓은 빈 트럭은 또 다른 재소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공주형무소로 향했다.
숲 속을 향하던 이들은 엄습해 오는 공포감에 온몸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왔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죽음을 직감한 일부 재소자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들었다.
죽음의 구덩이... 자욱한 화약연기
▲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금도금 치아
▲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금도금 치아
이들을 기다린 건 긴 구덩이였다. 1미터 깊이에 가로 약 14미터, 세로 2.5미터 크기의 구덩이였다. 구덩이에 70~80명이 두 줄로 늘어서 등을 맞댄 채 무릎을 꿇었다. 의족을 착용한 재소자는 맨 바깥 줄에 자리 잡았다. 이들을 향하고 있던 M1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칼빈 소총도 불을 뿜었다. 구덩이 안 사람들이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개를 땅에 떨어트렸다. 머리뼈를 관통한 총알도 많았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골짜기 전체에서 피어올랐다.
곧이어 숨진 희생자들의 몸 위로 돌덩이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땅에 머리를 박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재소자들의 뒷머리 위로, 등 위로 쉴 새 없이 큼직한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시신을 쉽게 매장하기 위해 흙 대신 돌을 채워 넣은 탓이었다. 대충 시신이 가려지자 이들은 총을 들고 부근에 있는 비슷한 크기의 다음 구덩이로 향했다. 이날 총소리는 저녁이 돼서야 그쳤다.
며칠 뒤 소문을 듣고 시신을 찾으러 구덩이를 찾아간 유가족들은 끔찍한 광경에 눈을 감고 코를 틀어막아야 했다. 구덩이 위로 손가락과 다리 등 사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골짜기 전체는 시신 썩는 냄새로 진동을 했다. 망연자실한 유가족들은 퍼질러 앉아 통곡하다 가슴에 한을 품은 채 되돌아와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9일 오전 11시 공주 왕촌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에서 중간설명회를 열고 구덩이 3곳에 대한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굵은 빗방울과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비롯해 공주시 관계자, 곽정근 공주지역 한국전쟁 피해자 유족회장 및 회원, 공주민주단체협의회 회원 등 약 100여 명이 참여했다.
공주~대전 옛길 오른쪽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한 3개의 구덩이에서는 집단 매장된 228구 이상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들을 총살하는 데 사용한 M1 탄피 236개와 카빈 탄피 32개, 45구경 탄두 3개, M1 탄두 53개, 카빈 탄두 4개 등도 함께 발굴됐다. 45구경 탄두는 확인사살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유골들은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 등이 겹쳐진 채 엎드린 모습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맨발로 끌려간 사람들 "신발 신은 사람이 없다"
▲ 박선주 유해발굴단장
▲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 속에서 발굴된 안경
박선주 유해 조사단장(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은 "유해 대부분이 구덩이 양쪽 벽을 향해 두 줄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발굴됐다"며 "손은 뒤로 묶여 있거나 일부는 목 뒤로 깍지를 낀 자세였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생자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고 이후 총격이 가해진 것을 의미한다.
유골은 3m에 7~8명씩 발견됨에 따라 한 구덩이에 70~80여 명이 묻혀 있었다. 따라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구덩이(5지점)를 합할 경우 최소 400명 이상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품으로는 철재 구조물의 의족과 1~1.5㎝ 단추 171개, 안경, 금도금 치아 등이 나왔다. 금도금 치아와 안경의 경우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 희생자 신원 및 유가족을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박선주 교수는 "유품 중 신발이 발굴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맨발로 끌고 간 것 같다"며 "특히 2지점에서는 흰색 단추가 주로 나와 다수의 보도연맹 관계자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발굴된 유해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지정한 감식소(충북대학교 유해감식센터)에서 정밀 감식이 진행될 예정이며, 최종 결과는 올해 12월경 발표될 예정이다.
진실화해위 유해발굴단장이 "매우 유감" 밝힌 까닭
[현장] 공주 왕촌 집단암매장지 유해발굴 '첫 삽'
▲ 박선주 민간인집단희생 유해발굴 조사단장이 공주 왕촌 암매장지 유해발굴에 앞서 희생자들에게 제를 지내고 있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매우 유감'이라는 글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12일 오후 2시 충남 공주 석장리박물관 앞에서 진실화해위 주최로 열린 공주 왕촌 희생자 추모제 및 개토제 행사장에서 경과보고를 겸한 인사말을 통해서다.
박 교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민간인집단희생 유해발굴 조사단장을 맡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집단희생 사건에 대한 유해발굴을 총지휘하고 있다.
또 이날 유해발굴을 시작한 공주 왕촌 암매장지에 대한 유해발굴팀을 이끄는 책임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는 민간인집단희생사건 외에도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가 이날 공식 인사말을 통해 '매우 유감'이라고 밝힌 것은 진실화해위의 민간인집단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 사업이 올해를 끝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과 2008년 한국전쟁전후 일어난 전국 7곳의 민간인집단희생지에 대한 유해발굴 작업을 벌여 10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올해는 충남 공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경남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전남 함평 불갑산 사건, 경북 경산코발트광산 사건 등 4곳에 대한 유해발굴 사업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는 전국에 산재한 수백여 곳의 민간인 집단희생 암매장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올해 예정된 암매장지 외에 더 이상의 유해발굴 계획이 없다.
박 교수는 이날 인사말을 이렇게 마감했다.
"정부와 국회에 유해발굴 사업의 필요성을 적극 알리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당부드립니다"
김동춘 상임위원 "산적한 과제 풀기 위해 슬기 함께 모아야"
그가 최선의 노력을 당부한 대상은 진실화해위 관계자들이고 개토제에 참석한 유가족들이다. 하지만 그가 유감을 표명한 진짜 대상은 정부와 국회다.
▲ 진실화해위 김동춘 상임위원
연단에 선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인사말을 통해 "아직까지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고 더욱 많은 집단희생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산적한 과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슬기가 함께 모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의 '유감표명'에 대한 우회적인 공감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희생자 유가족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전 산내에서 아버지를 잃은 한 유가족은 "올해로 유해발굴이 중단되면 대전 산내 암매장지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며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암매장지에 수십 년 동안 유해를 방치해 왔는데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중단돼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곽정근 공주유족회장도 인사말을 통해 "오늘 위령제를 겸한 개토제가 정부와 국회 그리고 지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마당이 되기를 바란다"고 꼬집었다.
땅 속 진실규명 첫 삽... 공주시 관계자 "유가족 아픔과 고통 위로"
한편 이날 공주 왕촌(일명 살구쟁이) 집단 희생 암매장지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렸다. 이에 따라 두 달간의 일정으로 59년 만에 땅속 진실을 밝히는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곽정근 공주유족회장은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며 "이제 비록 유해나마 밝은 햇빛을 보고 보다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잊혀지고 왜곡된 역사가 진실의 역사가 되고 아픔과 한이 화합과 상생으로 거듭나는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진실화해위 관계자 및 희생자 유가족들이 공주 왕촌 민간인집단희생지 현장에서 첫 삽을 뜨며 유해발굴 시작을 알렸다.
▲ 공주 왕촌 희생자 위령제에서 공주 구룡사 진명스님의 천도제 바라춤.
위령제 추도사를 거절해 사전 논란을 벌였던 공주시에서도 관계자가 참석해 추도사를 통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공주시장을 대신해 참석한 공주시 관계자는 "유가족들의 오랜 아픔과 고통에 위로를 표한다"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발굴현장에서 열린 유해발굴을 알리는 시삽식에도 참석해 유가족들과 함께 첫 삽을 떴다.
이에 따라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도 "개토제 행사를 물심양면 협조해 준 공주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답례했다.
이날 개토제 및 위령제는 희생자 암매장지가 마주 보이는 석장리 박물관 앞 금강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과 곽정근 공주유족회장, 박선주 충북대 교수(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 조사단장), 전국유족회 김종현 상임대표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노용석 진실화해위 유해발굴담당의 사회로 대전산내 유가족인 전숙자씨의 추모시 낭독과 공주 구룡사 진명스님의 천도제 바라춤, 희생자에 대한 제례 등 순서로 진행됐다.
공주왕촌 집단희생 현장은 1950년 7월 중순경 당시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수백 명이 트럭으로 실려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건이다
▲ 한 유가족이 공주 왕촌에서 희생된 가족의 유품을 태우며 명복을 빌고 있다.
구덩이 속 몰아넣고 탕!... 돌덩이 채워 매립
[공주왕촌 유해발굴 현장] 속속 드러나는 참혹한 학살 현장
▲ 돌덩이에 짓눌려 있는 희생자 유해. 가운데 둥근 형태는 희생자의 두개골이다.
▲ 유해 부근에 널려 있는 돌덩이. 상단 푸른색이 탄피이고 오른쪽 둥근 형태는 희생자의 두개골이다. 군경이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총살한 후 흙 대신 돌을 채워 매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 공주 왕촌 유해발굴팀(팀장 충북대 박선주 교수)에 의해 59년간 땅 속에 갇혀 있던 공주 왕촌 살구쟁이 희생자들에 대한 진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유해발굴팀은 유해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발굴 4일째인 16일에는 5지점의 매장추정지 중 1지점에서 유해 10여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해 부근에는 5~15kg에 이르는 돌덩이가 널려있었는데, 형태로 볼 때 유해의 몸과 머리부위를 짓누르고 있는 돌덩이가 많았다. 다른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박 교수는 "군경이 사람들을 총살한 후 쉽게 매장하기 위해 돌덩이를 채워 시신을 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부서진 두개골의 경우 이 과정에서 돌덩이에 머리를 맞아 깨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매립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신 위에 돌덩이를 채워 넣었고 부서진 두개골도 돌덩이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 군경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M-1 소총 8발 클립(clip)
총살 직전 상황도 드러나고 있다. 박 교수는 "유해의 형태로 보아 구덩이 안에 몰아넣고 쭈그려 앉은 자세에서 총살한 후 그대로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대전산내와 충북 청원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와 매우 흡사한 형태다.
현재까지 드러난 10여 구의 유해는 대략 20대 초반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 교수는 "1지점에서 대략 20여 구가 매장돼 있고 치아의 마모 상태로 미뤄볼 때 희생자 대부분이 2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주변에서는 수십 개의 탄피를 비롯해 탄창, 치아들이 발견됐다. 단추와 의족 등 유품도 나왔다.
▲ 훼손상태가 심한 희생자의 드러난 두개골
하지만 토질이 습한 탓에 유해 대부분이 삭아 없어져 유가족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토양에 습기가 많아 다른 곳에 비해 유해가 빠르게 훼손된 것이다.
발굴팀은 남아 있는 유골의 경우 손만 닿아도 부서져 내릴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진땀을 흘리고 있다. 발굴팀은 이후 표면 경화처리(코팅)로 남아 있는 유해나마 보존하려 하고 있으나, 훼손상태가 심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공주 왕촌 살구쟁이 집단희생 현장은 1950년 7월 중순경 당시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500~700여 명이 트럭으로 실려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희생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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