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무정부는 신호등 시하고 내달리는 자동차 격”
ㆍ저항가수 안치환, ‘달이 해를 영원히 가릴순 없다’고 현정부에 직격탄
2009 08/11 위클리경향 837호
이 시대의 저항가수 안치환. 그는 포크에서 록까지, 그리고 포크록 음악으로 사람과 삶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면서도 민족과 통일에 대해 끊임없이 노래해 온 사람이다. 반전·반미·통일을 부르짖는 현장에 공연이 곁들여지는 날이면 거의 어김없이 그는 등장했다. 지난해 광우병 파동시 대규모 촛불문화제가 있을 때에도,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이 열릴 때에도 그는 피를 토해내는 듯한 격정적인 발언과 노래로 관중을 휘어잡았다. 대학시절 학내 노래패 ‘울림터’로 시작했으니 지금까지 그 세월이 25년이다.
그만큼 수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던 운동권 출신 가수 중 가장 성공적으로 대중음악계에 뿌리를 내린 경우다. 실제로 생명력이 유난히 강한 그의 명곡들은 어제도 오늘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이 집회 현장의 단골메뉴라면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은 노래방 중년들의 애창곡이다.
“노 대통령 자살 기뻐하는 사람 있을 것”
그런 그가 8월 21일 소극장 콘서트를 연다. 서울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에서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는 곧 열릴 콘서트와 거리가 먼 질문 위주로 진행하기로 했다. 시국에 대한 그의 솔직한 생각과 저항가수로서의 인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6월 21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 무대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이 세상을 그 새에 비유하면 좌우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를 가지고 있는 우측의 날개를 요구한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간 보수세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전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지난 5월23일의 노 전대통령 서거 비보. 당시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아침에 축구를 하고 돌아와 TV 속보를 봤어요. ‘멍’했죠. 충격에서 한참동안 헤어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온 국민이 다 슬퍼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슬퍼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거든요.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게 극우건 누구건 간에요.”
그는 냉소적이다. 변함없이 기득권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부조리한 세상과 그것이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듯 담담히 또 무심히 받아들이는 대중에 지친 듯하다. 현재 무효 논란이 일고 있는 미디어법 통과를 지켜봐야 했을 때도 그는 자괴감과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미디어법이 본질적으로 가진 자들이 대중의 눈과 귀, 영혼까지 독점해 자기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일인데 그것을 막지 못하는 세상이 씁쓸하고 우습다”며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과 연관성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게 또 우리네의 수준 아니겠느냐”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미디어법이 통과된 7월22일, 언론악법 저지를 위한 KBS 노조 행사에 참여했어요. 끝나고 와서 보니 법이 통과됐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아침 일식이 있었죠. 달이 해를 잠깐 가릴 순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순 없는 거예요. 이 말을 수구세력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반독재민주화 운동이 꽃을 피웠던 1980년대 운동권 가요의 한 축을 형성했던 그. 최루탄과 핏빛 죽음으로 물든 암울했던 1980년대와 ‘독재로의 회귀’가 아니냐는 원성을 듣고 있는 2009년 이명박 정부를 그는 어떻게 비교할까. 지난 2월에 열린 용산참사 추모 촛불문화제에서 안치환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수레바퀴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1980년대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은 아니에요. 이 말은 싸움이 강도가 다르다는 얘기예요. 1980년대는 20대 젊은 대학생들이 사회변혁의 동력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20대보다 20년 전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던 386을 중심으로 한 기성세대가 세상에 대한 절망감을 더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기성세대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20년 전 대학생 시절만큼 극렬할 수 없어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으니까 투쟁의 강도가 약하죠. 과거처럼 화염병을 들고 싸울 수는 없잖아요.”
시대 상황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느낌이기는 해도 20년 전만큼의 암울함은 아니라는 게 안치환의 생각인 듯 했다.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동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종종 노동자들의 투쟁 마당에 서기는 해도 스스로 겉도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공권력까지 투입된 평택 쌍용자동차 노사분규나 용산참사에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의 한계로 인식하는 듯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띄엄띄엄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지만 그는 솔직했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체제 비판 옳아도 인격 모욕은 삼가야”
“잘못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만 한 개인에 대한 인격적 모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명박씨도 결국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잖아요. 일부에서는 그를 가리켜 ‘쥐새끼’라고까지 표현하는데, 그건 좀 심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어요. 제 노래 중에 <한다>라는 곡이 있어요.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 시절의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고 노래한 것인데 가사 중에 ‘권력의 담 밑에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 지낸다’는 표현이 있죠. 6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쥐새끼라는 표현이 나오니까 관중들이 크게 환호해요. 그들은 이명박씨를 떠올린 거예요.”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발언이 날카롭다. 그는 “이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앞만 보고 내달린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자동차도 신호등이 있으면 서야 하고, 좌회전과 우회전도 해야 하잖아요. 때론 옆으로 굽은 길로도 가고요. 그것이 정치이고 드라이브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고속도로만 깔고 직진만 하려고 해요. 자동차가 신호등을 무시하는 것처럼 이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게 큰 문제예요.”
안치환의 음악생활은 연세대 사회사업학과 재학 시절의 노래패 ‘울림터’에서 시작됐다. 이어서 1986년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거치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팬층이 두터워진 1990년 첫 번째 솔로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앨범은 제작자와의 이해관계로 팬들과 만나지 못했으며, 이후 1집과 2집의 합본으로 발매됐다. 이 앨범에 <저 창살에 햇살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잠들지 않은 남도>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이 수록돼 있다. 이어서 낸 3집은 그를 대중가수로 확고히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소금 인형>과 <귀뚜라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고백>과 김남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자유>에서는 솟구치는 샤우트 창법을 들려줬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의 밴드 이름(안치환과 자유)에도 붙은 이 <자유>라는 노래로 인해 그는 운동권 진영의 불평을 듣기도 했다.
“이 노래가 운동권 사람들을 많이 불편하게 했어요. 왜 너는 운동권을 욕하느냐는 거예요. ‘사람들은 만날 겉으로는 소리 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하는 가사가 운동권을 겨냥한 것으로 들렸나 봐요. 전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에요. 대중을 향한 노래였어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김남주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부끄러우면 부끄러워하라고 해라. 넌 편하게 부르면 된다’고 하세요.
선생님 말씀처럼 이 노래를 듣고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해야겠죠. 저 스스로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한 번도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 노래가 표방한 자유는 자기의 존재를 역사의 현장에 던지는 것인데 과연 나는 그런가 하고 생각하면 자신이 없거든요. 제 밴드의 이름에 자유가 들어간 것은 제 음악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단원들이 특히 <자유>를 좋아한다 해서 붙여진 거예요.”
돌이켜 보면 안치환을 향한 직설적인 비판은 정작 따로 있었다. 서정적인 발라드 <내가 만일> <너를 사랑한 이유> 등이 실린 4집을 발표하고 활동할 즈음이다. ‘부르주아 감상주의자’라거나 ‘투쟁성이 약하다’거나 심지어 ‘변절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돈만 밝힌다’는 얘기도 있었다.
“감상주의자라느니 돈을 밝힌다느니 하는 말이 들렸지만 반박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몇몇 예외적인 무대를 제외하고 저는 개런티를 안 주면 무대에 안 서요. 저는 프로예요. 그런데 저더러 돈을 밝힌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가수들에게는 700만원, 800만원을 주고 부르면서 저에게는 50만원 주면서 노래하라고 한 사람들이에요. 반박할 가치가 없죠. 또 저에게 감상주의자라며 욕하는 사람은 노래하는 아티스트의 기본적인 심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바보예요. 로맨티스트나 감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없으니까요. 그런 말이 기분 나빠서 <철의 노동자>란 노래도 만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어요. 제 노래만큼 생명력이 있는 곡이 있냐고요.”
맞다. 때론 서정적이고 때론 장엄한 그의 노래는 그 어떤 투쟁가보다 대중의 심금을 울린다. 언제 들어도 녹슬지 않고 빛바래지 않은 혼이 살아 펄떡인다.
시인 정호승은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며 에밀레의 종소리를 떠올렸다”고도 말했다. 어쩌면 대중은 안치환에게만은 직설적 화법을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가장 격한 표현의 가사로 된 <개새끼들> <부메랑> 등의 노래가 담긴 8집이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가장 외면당한 음반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8집은 그가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을 목격하며 감정이 극에 달해 완성한 앨범이다. 그러고 보면 안치환의 노래에는 김남주, 정호승, 김지하, 신경림 등 시인의 시를 가사로 삼은 게 많다. 아름다운 시와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안치환의 목소리가 맞물리면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내 꿈은 앞으로 25년 더 노래하는 것”
지금까지 그가 낸 정식음반만 10장. 수록된 곡만 해도 대략 140~150곡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주일 간 펼쳐지는 올 8월 콘서트에서는 <너를 사랑한 이유> <당당하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와 신곡 등 사랑과 이별, 우리들 삶의 이야기와 시대의 아픔이 새겨진 노래들을 고루 섞어 들려줄 예정이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2006년에 안치환에게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라는 글을 써 선물했다. 신 교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안치환이 품고 있는 작은 소망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안치환의 꿈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가수로 살아온 25년의 세월만큼 앞으로 25년 동안 더 세상과 사람을 노래하는 가수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꽃처럼 바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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