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최북이란
조선 영조 때의 화가가 있지요. 그는 의미있는 그림을 선물했을 때 반응이
변변치 않으면 두말없이 그림을 찢었으며, 의미없는 그림에도 반색을 보이면
도리어 뺨을 치고, 받은 돈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북은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으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 대신 그의 삶은 늘 고독이 함께
했습니다.
이런 최북의 삶은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에 잘 나타납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귀가하는 나그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갑니다. 그림 속 나그네는 어쩌면 거침없는 성격과 고달픈 인생의 최북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인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졌는데 이 그림을 그린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고독한 삶이 더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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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90. 고무신은 우리의 전통신이 아닙니다 (2004/09/15)
60년대 어려운 시절 많은 서민들은 “타이어표 통고무신”이란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가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무신을 신는 것을
봅니다. 그럼 고무신이 우리의 전통신이 맞을까요?
2백여 년 전 브라질에 간 한 미국사람은 그곳의 원주민들이 고무나무에서 나온
물에 발을 보호하기 위해 담그는 것을 보고, 고무로 비신(우화:雨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16년 일본에서 이것을 들여와 '호모화(護謨靴)'란
이름으로 만들어 신었구요. 이것을 1922경 한국에 맞게 개량하여 팔기 시작한
것이 바로 우리의 고무신입니다. 처음엔 남자는 검정색, 여자는 흰색을 신었지만
점차 남녀구별이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고무신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전통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무신을 신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통신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