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 양 아무개가 공주목사가 되었는데 삼복에 파리가 많은지라 양이 이를 싫어하여 아전으로부터 기생과 종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아침 파리 한 되를 잡아 바치게 하고 이를 독촉하니 위아래 할 것 없이 다투어 파리를 잡느라 쉴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주머니를 가지고 파리를 사러 다니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을 파리 ‘승(蠅)’ 자를 써서 <승목사(蠅牧使)>라고 불렀다.”
위는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글입니다. 용재총화는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白眉)라는 평가를 받지요. 또 고려에서 조선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지고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 ·역사 ·종교 ·예술 등 당시 사람들의 삶을 골고루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비문학(口碑文學) 연구 자료로 활용되지만, 승목사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많으므로 이 무더위에 원두막에서 파리를 쫓으며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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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1200. 칠거지악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면 이혼 불가 2007/12/03
20년 이상을 함께 산 부부 10쌍 중 2쌍이 이혼하는 등 중년이혼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이혼할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엔 질투를 할 때, 아들을 낳지 못할 때, 부모에게 공손하지 못할 때, 바람을 피우거나 나쁜 질병이 있을 때, 말이 많아 입방아에 오르고 물건을 몰래 훔쳤을 때 등은 칠거지악 (七去之惡)이라 하여 부인을 버릴 수 있었던 여성에게만 불리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반은 임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혼을 하면 벌을 받았습니다. 또 부모 삼년상을 치르고 있을 때나 가난했지만 혼인 이후 부유해졌거나, 부인이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을 때 등 ‘삼불거(三不去)’의 경우에는 절대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고종 때는 자녀가 있는 경우를 하나를 더 보태어 ‘사불거(四不去)’가 되었습니다. 여성에게 절대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요즘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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