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군이 도회에 살려면 첫째 이발사와 목욕탕 주인과 먼저 친해 두어야 한다. 돈 육전이 없어 몸에서 악취가 물쿵물쿵 나고 불과 삼사십전 이발료가 없어 얼굴이 털투성이가 되고 장발이 되고 보면 혹 별종 색맹객이 있어 사상가나 철학가로 보아준다면 다행이지만 날카로운 시대 처녀들의 눈이 잔나비(원숭이) 상판을 연상할 우려가 많으니 연애하기는 벌써 빗나간 일이다. 그러니 돈 없을 때라도 마음 놓고 자가용처럼 쓸 이발관, 목욕탕이 있어야 한다.” 《모던 모세, 1930; 김진송, 1999》
위 글은 1930년에 쓰인 “도시생활 5계명” 제일조입니다. 우리나라에 공중목욕탕이 처음 생긴 것은 1924년 평양에서였다고 하지요. 이때 목욕탕은 부(府)에서 직접 관리하였습니다. 서울에는 1925년 공중목욕탕이 생겼고, 광복 당시에는 온 나라에 있는 공중목욕탕이 48개였다고 합니다.
6ㆍ25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이때 미국은 밀가루, 면섬유 등 자신들이 먹거나 쓰고 남은 농산물을 우리에게 공짜로 원조해 주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이 구세주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때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것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꼍엔 우리의 오랜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운도 따랐습니다. 미국의 밀가루가 밀려들어 오자 오랫동안 재배되어 오던 우리밀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우리 체질과 맞지 않는 것은 물론 농약에 범벅이 된 서양밀에 밀려난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밀려든 면섬유에 우리의 목화 재배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때부터 목화를 심어 당시만 해도 동아시아 최고의 직조술을 가졌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