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내가 보고자 했던 TV프로그램을 기다렸다가 본 적이 많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스포츠 중계를 제외하면 그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일요일(어제) 저녁 TV프로그램 시작 시간이 되자 꺼놓았던 TV를 켰다. 가끔 케이블 TV 다시보기를 통해 재미있게 봤던 '남자의 자격'이었다. 전날 TV에서 '남자의 자격' 재방송을 보고, 이날 출연진 7명이 하프마라톤 도전기가 방영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지난 11월 15일 벌어졌던 대회여서, 결과를 알고 싶다면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일이다. 그러나 난 결과가 중요한게 아니고 대회장에서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내심 기대했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거부했다.
출연자들은 몇주간의 사전 훈련을 했다고 한다. 기본체력이 되는 사람도 사전 훈련이 안되면 하프코스 완주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전 훈련을 했다곤 하지만 출연진 7명중 적어도 3명은 중도 포기가 불을 보듯 뻔했다. 다만 그들이 포기를 하더라도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통원치료중인 김태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6명 모두 완주했다. 기적이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3명은 시간제한을 넘겼기 때문에 완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라톤이 아름다운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끝까지 달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날 날씨는 훈련된 달림이들조차 힘들어할 정도로 진눈깨비가 퍼붓는 최악의 기상상태였다.
'도전 자체가 무리'란 평가를 받았던 '국민약골' 이윤석의 도전은 눈부셨다. 뛰다가 주저앉을 정도로 다리에 무리가 왔지만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이윤석은 "그동안 끝까지 한 게 하나도 없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알고 보니 이윤석의 어머니가 '전투기 미션'을 성공하지 못한 이윤석에게 실망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채찍이 이윤석을 나무 막대에 의지해 간신히 걸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게 했던 것 같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완주에 성공한 이윤석은 김성민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윤석은 이날 대회 하프마라톤 부문에서 4시간58분대의 기록으로 꼴찌를 차지했지만 그의 완주는 그 무엇보다 값진 결과였다. 불혹을 훌쩍 넘긴 이경규도 촬영차량에 들어갈 때는 마침내 포기하는 듯 싶었지만 편안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한 끝에 마침내 완주해냈다. 아마 '국민약골'이라는 이윤석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심 때문이었을까. 결국 이윤석보다 1분쯤 앞서 골인했다.
외로운 질주를 계속했던 김성민은 힘든 자신과 스스로 타협을 할까봐 불안해 하며 끝까지 달려 감동을 선사했다. 스스로를 이기며 완주에 성공한 김성민은 벅찬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막내둥이 윤형빈은 이날만은 왕비호가 아니었다. 비호감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지만 초반에 이윤석을 염려해 동반주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동반주한 이후 치고 나가기 시작한 그 역시 훈련량의 한계를 극복하고 끝내는 선두로 달리던 김국진을 추월하며 막내의 화려한 반란을 이뤘다. 대회 준비를 차분히 해왔던 김국진도 꾸준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한 끝에 어려울 거라던 하프코스 완주를 이뤄냈다. 쾌조의 출발을 했던 정진 역시 후반들어 예전에 당했던 부상으로 통증을 호소하면서 걸어가다가 선두를 모두 내주고 뒤쳐졌지만 무릎통증을 이겨내고 끝까지 완주했다. '국민할매' 김태원은 통원치료중인 질병 때문에 끝내 포기했다. 하지만 그도 연습때 보여줬던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대회 초반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들은 진눈깨비가 뿌리는 최악의 기상조건과 함께 달릴수록 더해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완주에 대한 의지를 보여 '사투'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방송 중간 중간에 걸음을 절룩거리고 구토 증세를 호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출연자들을 말리는 제작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작진이 '포기하라', '천천히 하라', '무리하지 말라'며 이들을 달랬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TV를 보는 동안 한편으론 그들의 모습에 우습기도 했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라톤이라는, 아무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멤버들의 도전과 노력하는 과정은 예능을 넘어서 큰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무한도전'이나 '1박2일' 혹은 '패떳'의 멤버들이 마라톤에 도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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