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이 선고보다 더 무서운 까닭
일반 시민, '구형' 보도만 보고 유죄 판단
<시사IN>
경기방송에서 농업·농촌 전문 PD로 일하는 노광준씨는 시사에 관심이 많고 뉴스도 잘 챙겨보는 블로거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8월까지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감옥에 수감된 줄 알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감옥에 간 적이 없었고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내가 왜 잘못 알고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6월에 검찰의 '징역 5년 구형' 기사를 보고 착각한 거였다."
그는 우리 언론의 잘못된 재판 보도 관행을 지적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일방적인 검찰의 구형을 보도하면서 '검찰'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 측 변론은 무시해버린다. 당연히 읽는 사람 처지에서는 헷갈릴 가능성이 있다. 나같이 구형과 선고의 의미를 구분하는 미디어 종사자도 혼동할 정도라면, 보통 사람이 겪는 혼란은 더 클 것이다."
구형은 어감상 국가기관이 형을 내린다는 인상을 준다. 피고인은 선고 전에 이미 낙인이 찍힌다.
구형(求刑)은 검찰, 선고(宣告)는 재판부의 몫이다. 실제 형량을 결정하는 선고와 달리 구형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형식적 절차일 뿐이다. 하지만 종종 두 단어는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12월21일 광우병의 잠재적 위험성을 보도했던 < pd수첩 > 제작진에 대해서 검찰이 징역 2~3년을 구형했다. 이 뉴스는 주요 언론사 등에 ' < pd수첩 > 실형 구형' 등의 제목으로 크게 보도됐다. 인터넷에서 < pd수첩 > 보도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논쟁을 벌인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누리꾼 가운데는 < pd첩 > 제작진이 징역 선고를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누리꾼(ID 떡찐머리)은 "( < pd수첩 > 이 받은 것은 선고가 아니라) 구형이다…. 일반인은 검사가 구형하면 실형을 받은 줄 안다"라며 일반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했다. 지식 문답 사이트에는 구형과 선고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반복된다.
언론인 김종배씨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난 10월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에서 언론의 검찰 구형 보도 관행을 비판했다. "언론은 결심공판이 열리면 검찰의 유죄 의견과 구형량을 상세히 전한다. 하지만 검찰의 구형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구형은 기소 행위의 연장선일 뿐인데도 언론이 구형 보도를 비중 있게 쏟아내는 것은 피고인에 대한 '이중 가격'이다"라고 말한다.
구형은 형법에 없는 단어
우리 형사소송법에 '구형'이라는 단어는 없다. 다만 302조에 '피고인신문과 증거조사가 종료한 때에는 검사는 사실과 법률 적용에 관하여 의견을 진술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법학)는 "비록 법에 구형이란 표현은 없지만, '의견 진술' 조항을 두고 검찰이 구형과 논고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검찰의 '의견 진술' 권리를 밝힌 형사소송법 302조는 일본 형사소송법 293조를 베낀 것이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검찰이 재판 마지막에 피고의 적정 형량을 밝힌다. 하지만 외국에서 검찰의 구형은 한국과는 의미가 다르다.
영어권 국가의 언론은 검찰 구형에 대해 보도 자체를 잘 하지 않을뿐더러 구형을 전할 때 쓰는 동사는 'ask' 'demand' 'request' 'call' 등이다. 보통 사람이 들었을 때 검찰이 재판부에 일방적으로 형을 요구하는 의미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고 보도의 비중과 구형 보도의 비중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대중은 선고 형량만 기억할 뿐 검찰 구형량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한자(求刑)로 표기하기 때문에 '요구한다(求)'라는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우리말에서는 구형이 '형을 부른다(口刑)'와 비슷한 어감으로 들린다. '판사가 징역을 구형했다'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쓰인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구형과 선고를 혼동하는 것은 대중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도 아니다. 언론의 보도 태도에 달린 문제다"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나도 가끔 기사 헤드라인만 보면 구형과 선고를 헷갈릴 때가 있다. 어떤 경우는 'OOO 징역 5년' 이라는 식으로 구형이라는 말이 빠진 경우도 있다. 물론 구형이 선고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언론이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구형 보도는 신중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미국 검사(위) 구형의 영어식 동사는 ask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유재성 변호사는 "구형량은 심리적으로 판사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대중에게는 마치 엄청난 범죄구나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전직 검사 출신인 금태섭 변호사는 "검찰 내부에서는 구형량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형량과 선고 형량을 비교해 항소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구형할 때는 논고문을 써야 한다. 작은 사건의 경우에는 구형이 곧 선고와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판사의 선고에 비해 책임감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구형량을 엄밀하게 계산하기 때문에 선고량과 크게 차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일본 언론은 한국처럼 구형 보도를 비중 있게 보도한다. 검찰 구형량이 99% 선고 형량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적 의미가 있는 재판에서 검찰 구형량과 판사 선고량이 차이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지난해 기소한 사람에 대한 1심 무죄율이 27.2%였다. 검찰의 구형 책정에 정치적 목적이 없는지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한 누리꾼(ID Mr.Fancy)은 한명숙 전 총리 강제 소환 소식이 전해진 뒤 쓴 글에서 "검찰은 무조건 '몇 년 구형' 언론 플레이가 가능한 단계까지 밀고 갈 것이다. 흠집내기에 그만한 전술이 달리 있을까. 검찰 구형과 법원 선고를 혼동하는 국민이 널린 한국에서만 가능한 코미디다"라고 썼다.
12월23일 이명박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 법제처장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우리의 법은 너무 어렵다. 법제처가 법 용어를 생활용어에 가깝게 하려 하고 있으나 대학 나온 사람이라도 법을 전공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법학 교수들은 '징역 OO년 구형'이라는 표현을 '징역 OO년 요청''징역 OO년 요구' 등의 표현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징역 OO년 주장'이라는 표현도 가능해 보인다. 고려대 하태훈 교수는 "'징역 OO년을 청하다'라는 문장도 괜찮다고 본다. 하지만 구형이라는 말이 학계나 법조계에 익숙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바꿔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제처는 "순화시킬 법률 용어 가운데 '구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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