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차별 항의’ 권희로씨 별세
“유골 반은 영도앞바다에, 나머진 일본 어머니 묘에” 유언
<연합뉴스>
재일교포 차별에 항의하며 일본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복역하다 영주 귀국한 권희로씨가 26일 오전 6시50분께 전립선암으로 투병중이던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 재일교포 차별에 항의하며 일본에서 야쿠자를 총기로 살해한뒤 무기수로 복역하다 영주 귀국한 권희로씨가 26일 전립선암으로 투병중 별세했다.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 빈소에 마련된 영정모습.
재일교포 2세인 권씨는 1968년 2월20일 시즈오카(靜岡)현에서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모욕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한 뒤 부근 여관에서 투숙객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는 바람에 1975년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권씨는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며 일본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권씨 귀국운동에 힘입어 1999년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돼 영주 귀국했다.
권씨는 열흘전 자신의 석방운동을 주도했던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에게 “스님 덕분에 형무소에서 죽을 사람이 아버지 나라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됐다”면서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뿌려주고,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센진, 돼지새끼” 야쿠자 권총 사살
야쿠자에 총구 들이댔던 ‘권희로 사건’의 전말
26일 82세의 나이로 별세한 권희로씨의 기구한 일생은 1968년 2월 20일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시작됐다. 일본 폭력조직인 야쿠자 요원들이 빌려쓴 돈을 갚으라며 협박하며 권씨에게 “조센진,더러운 돼지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자 그는 갖고 있던 엽총으로 야쿠자 두목과 그 부하를 사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재일교포 무기수 출신 권희로씨가 지난 2000년 9월 3일 부산시 동구 범일동 H아파트에서 난동을 부리다 상처를 입고 치료를 받은 뒤 경찰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살해 후 그는 현장에서 45km 떨어진 시즈오카(靜岡)현 스마타쿄(寸又峽)의 후지노미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여관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일본에서 살면서 온갖 차별과 모별을 겪었던 그는 인질극을 통해 재일교포의 차별문제를 부각시키는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당시 사건은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고,그의 인질극은 TV와 신문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그동안 쉬쉬하던 재일교포의 인권과 차별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득숙(1998년 작고)씨는 아들에게 한복 한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자신도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그의 투쟁은 사건 나흘째에 기자로 위장한 수사관에 의해 전격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체포된 뒤 여관주인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주며 여관비로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그의 인간미를 엿보게 했다.
권씨는 이 사건으로 8년간의 긴 법정공방 끝에 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시즈오카 구치소에서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돼 31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1999년 영주귀국,부산에 정착했다. 그의 석방운동에는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이 큰 역할을 했다.
박삼중 스님은 1970년부터 외롭게 권씨 석방운동을 펴온 이재현씨(서울 봉천3동)와 함께 1990년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규슈지방갱생보호위원회에 접수시켰으며 1993년에도 1만3천여명의 서명과 석방요청서를 일본 법무성에 보냈다.이 서명서에는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김영삼 민자당 대표도 서명했다.
삼중스님 “權이 미워한 것은 日의 한국인 차별”
“권 선생이 미워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정부나 경찰들이 재일동포에 행한 차별이었습니다”재일동포 차별에 항의,일본 야쿠자를 살해한 뒤 무기형을 살던 권희로씨의 석방운동을 벌이는 등 권씨 귀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귀국 후에도 후견인을 자처했던 삼중 스님은 26일 오전 빈소가 차려진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 장례식장에서 “(권씨는) 한국에 관광을 온 일본인들에게는 통역도 해주며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권씨가) 잘해준 일본인 관광객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며 “그는 일본인과 일본을 미워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권희로씨가 지난 1999년 9월 9일 첫방문지인 부산 자비사에서 어머니 유해봉안식을 마친뒤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스님은 생전 권씨가 자신이 일본에서 한 일에 대해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며 “일본 정부나 경찰이 한국인에 행하는 차별대우를 미워한 것일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생전 권씨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였다으며 공교롭게도 권씨가 숨진 오늘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삼중 스님은 권씨가 일본에서 출판된 한 백과사전을 보여준 기억을 떠올리며 “백과사전에 일본에게 가장 무섭고 치열하게 투쟁한 사람으로 안중근 의사와 권씨의 사진이 나란히 수록돼 있었다”며 “권씨는 이 사실에 대해 긍지를 느끼고 있었으며 안 의사가 숨진 중국 여순감옥에도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권씨는 1999년 가석방으로 우리나라에 영주 귀국한 이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왔다.
스님은 “부모의 조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권씨가 언어나 풍속을 몰라 많이 힘들어했고 영도 바닷가에서 일본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된 최근엔 11년 동안 부모 고향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잘 살다간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삼중스님은 권씨가 야쿠자를 살해한 혐의로 32년을 복역한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보낸 유년기때도 수시로 소년원과 감옥을 들락거렸고 귀국한 뒤에도 2년6개월을 복역하는 등 그의 생애 82년동안 5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을 형무소에서 보낸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된 지난 13일 동구 수정동의 자택으로 찾아온 삼중 스님에게 권씨는 “나는 이제 어머님 곁으로 갑니다.죽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며 “죽으면 내 뼈의 반을 아버지가 출생한 영도 바닷가에,나머지 반을 어머니 묘가 있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카게가와에 묻어달라”고 비화를 소개했다.
<권희로씨 사건일지 및 약력>
△1928년 11월 :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출생.
△1934년 : 시미즈 소학교 입학.
△1935년 : 어머니 박득숙씨 김종석씨와 재혼.김희로의 성씨는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임.그러나 본인은 권희로라고 항상 말함.
△1939년 : 5학년 때 시미즈 소학교 퇴학처분.
△1943년 : 절도 등의 죄로 경찰에 체포.일본패전 때까지 소아이 소년보호원 신세를 짐.
△1944년 : 남은 가족은 나카지마의 지하비행기 건설공사에 징용됨.이 공사에는 조선인 3천여명이 동원됨.
△1946년 : 절도.횡령죄로 복역.당시 그의 가족은 귀국을 위해 짐을 꾸렸으나 조국의 정세가 너무 불안해 포기하고 결국 일본에 정착함.
△1967년 : 아내와 헤어짐.결혼에서 이혼까지 8년여가 그에게 가장 안정된 시기였음.
△1967년 : 시미즈시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싸움이 있었고,이때 경찰관이 “너희 조센진들은...” 운운 하자 그와 싸움.외국인 등록기한 끝났으나 재등록하지 않음.의붓아버지 자살.
△1968년 : 2월 20일 나이트클럽 ‘밍크스’에서 금전문제로 얽힌 폭력단 두목 등을 총살함.이튿날 후지미야 여관을 점거하고 신문,TV 등을 통해 민족차별문제 호소함.24일 체포돼 3월 17과 4월 12일 두차례에 걸쳐 기소됨.6월 25일 첫 공판 때 법정에 서기를 거부.이후 몇차례의 공판을 거쳐 11월 6일 시즈오카 구치소에 수감됨.
△1975년 : 무기징역 확정 판결받고 시즈오카 구치소에서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여기서 24년간 복역△1999년 6월 29일 : 도쿄의 후추 형무소로 극비리에 이감.
△1999년 8월 23일 : 일본법무성,권씨와 박삼중 스님에게 석방 결정 사실 통보.
△1999년 9월 7일 : 석방과 동시에 귀국.
△2000년 9월 3일 : 부산서 여자문제로 난동부리다 경찰에 연행.이 사건으로 이틀 뒤 구속.
△2010년 3월 26일 :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부산 동래 봉생병원에서 사망.
故권희로 파란만장 삶 다룬 ‘김의 전쟁’ 어떤 영화?
재일교포 차별에 항거해 야쿠자 2명을 죽인 혐의로 일본에서 복역하다 귀국한 권희로씨가 26일 사망한 가운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김의 전쟁’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김의 전쟁’은 지난 1992년 개봉된 작품으로 김영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이혜숙, 유인촌, 김현우, 김형일 등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특히 유인촌은 극중 김희로 역을 맡아 권희로씨의 실제 삶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권희로씨의 파란만장한 삶을 스크린 위에 옮겨 놓은 ‘김의 전쟁’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멸시와 차별에 항거하다 전과 6범이라는 꼬리표 단 주인공 김희로가 일본 야쿠자 소가(김형일 분)를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권씨는 지난 1968년 2월 20일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돼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32년을 복역한 바 있다. 당시 권씨는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며 일본 경찰의 사과를 요구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편 고인은 그동안 전립선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오다 26일 오전 6시 50분께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봉생병원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시신은 같은 병원 장례식장 2호에 마련됐으며 오는 28일 오전 8시 30분 발인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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