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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쉬멍 걸어요

한라의메아리-----/바람속의탐라

by 자청비 2010. 11. 2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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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쉬멍 걸어요…속도 너무 빠르면 영혼이 못따라와
대한민국은 토목공화국 길은 숨을 쉬는데 시멘트가 막아
제주오름 할머니 젖가슴 같아…각지고 날선 것도 품어줘
[매경이 만나 사람] 올레길 만든 서명숙

매일경제

 

이 여자 참으로 안티다. 말끝마다 `안티`를 달고 산다. 우선 세상에 안티다. 속도 지상주의 시대에 미련스럽게 `느림`을 설파한다. `문명, 개발, 첨단` 이런 단어엔 철저하게 등을 돌린다. 경쟁사회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부리나케 뛰어야 할 판에 천천히 걸으란다. 그것도 느리게, 느리게. 그런데 `빨리빨리` 세상에 이런 `느림`이 먹힌다. 전 국민의 생활패턴을 서서히 바꿔놓고 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걸은 `올레`길을 한둘이 따라 걷더니 이젠 2500만 전 국민이 따라 걷는다. 길 하나로 제주를, 대한민국을, 그리고 전 국민의 의식까지 바꾸고 있는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53). 정작 본인은 "(올레)길이 한 일이지 내가 했느냐"며 비켜간다. 자기 자랑도 정면으로 거부한다. 길 하나로 대한민국을 바꾸는 당찬 여자 서명숙의 3코스를 꼬닥꼬닥, 놀멍쉬멍 걸어보자.

 

◆ 서명숙 제1코스 : 행복

= "어떠세요. 행복하세요?"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 `aA카페`. "CNN이 와도, 워싱턴포스트가 와도 인터뷰를 안 하겠다"며 버텼던 서 이사장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속내를 털어놓는다. "모순된 상황이야. 정말이지 너무 바빠. 사망 일보 직전이야. 내 영혼한테 미안할 지경이지. 매경이니까 (인터뷰)하는 거야." `모순`이란 단어에 힘을 준다. 느리게 살자고, 인간의 속도를 되찾자고 시작한 일에 그만 휩쓸려버린 것이다. 꼬닥꼬닥(느릿느릿), 놀멍쉬멍(놀면서 쉬면서), 남들에겐 느림을 부르짖지만 정작 본인의 속도는 초스피드였다는 것.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는 정도였단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산 인디언 종족은 그래. 말을 달리다가 잠깐씩 섰다 가거든. 이유를 물으면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준다`고 하지. 올 연말엔 정말 내 영혼에 쉴 시간을 줘야겠어." 언제부턴가 언론 인터뷰에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이게 서명숙식 행복론의 핵심이다. 인간의 속도, 자연의 리듬을 되찾을 것.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주변을 보면서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아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 푸념은 늘어놓지만 얼굴 한편엔 행복감도 비친다. 바쁜 만큼 얻은 게 많아서일 것이다. 사실 올레길은 혁명이나 다름없다. 제주 둘레를 도는 자그마한 길 하나가 몰고온 파장은 그야말로 `나비효과`다.

 

서 이사장이 2007년 처음 개장했을 당시 넉 달간 3000명에 불과했던 올레꾼(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2008년 3만명으로 늘었고 작년 한 해 동안엔 25만1000명이 방문했다. 올해는 10월 말까지 59만4000명이 다녀갔으니 벌써 작년의 2.4배에 달한다. 걷기 열풍은 기본이다. `아류 길`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지리산과 북한산 둘레길을 비롯해 서울 성곽길, 정선 아라리 옛길, 무등산 무돌길, 이 모든 것의 진원지는 올레다. 상상을 초월하는 유무형의 경제적 효과에 `올레노믹스`란 신조어도 나온다. 올레 유행어만 봐도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올레 용어집을 따로 만들어야 할 판이야. 너무 많아. 올레폐인은 기본이고. 자연에 중독이 된다는 올레뽕이란 말도 있지. 난 이렇게 표현해. 올레뽕을 맞으면 올레폐인이 되고, 결국 제주로 올레이민을 오게 된다고." 상태가 좀 심해지면 올레 장기수가 된다. 제주도에 숙소를 얻어놓고 몇 달씩 묵는 이들이다. 이쯤 되니 `올레교`로 불릴 만도 하다. 올레길을 안내하는 이는 올레 전도사다. 스스로 올레길의 효능을 떠벌리고 입소문을 내는 단계는 `올레 간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주는 당연히 서 이사장일 터. 슬쩍 곤란한 질문을 던지자 오름처럼 둥글둥글 받아친다. "신 기자 보니까 딱 그 질문 나올 것 같더라. 예상 답안 불러줄게(웃음). 교주는 자연이지. 난 가교 역할을 했을 뿐이고."

 

◆ 서명숙 제2코스 : 안티 공구리

= 올레길은 편하다. 시선에 걸림이 없다. 그녀의 표현대로 꼬닥꼬닥, 놀멍쉬멍 그저 걸으면 된다, 이유가 있다. 21코스. 서명숙이 만든 그 모든 올레길을 관통하는 원칙이 `안티 공구리`여서다.

 

"대한민국은 토목공화국이잖아. 배가 터질 정도로 건설을 해왔지. 지금도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잖아. 딱 그 반대의 길을 찾은 게 올레야." 그녀가 찾은 올레길은, 그리고 그녀가 찾아갈 길도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그 길은 땀과 노력의 길이다. 지도를 딱 펼쳐놓고, 나무 데크를 쫙 깔면 끝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그걸 그녀는 안티 공구리라 부른다. 서 이사장은 요즘 한라산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백록담 정상까지 이어진 나무데크를 보면 자연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것 같은 느낌이란다. 자연보호가 명분이라는데 방법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세계 환경수도로 제주를 밀면서 시에서 또 공사를 생각하더라고. 제주 전체가 살아있는 수석박물관이고, 생태박물관인데 거기에 또 손을 댄다고 저 난리니." 그녀에게 제주는 최고의 절세미녀다. 이런 개발 일변도식 행정은 자연 그대로의 미녀에게 성형수술부터 하려는 꼴이란다. `안티 공구리.` 바로 흙길과 자연의 길은 활인(活人)의 길이다. 공구리 길엔 울림이 없다. 리듬이 없다. 당연히 살인(殺人)의 길이다.

 

자연의 길 올레엔 울림이 있고 리듬이 있다. 꼬닥꼬닥 걸을 때 그 울림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 자연으로 이어진다. 자연과 생의 기운이 진동하고 그 진동은 가슴 깊은 곳을 울린다. 느리게 자연의 리듬을 따라 생의 리듬을 찾는다.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월급의 절반을 압류당해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순심 씨는 이 올레길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소중한 웃음을 되찾았다고 한다. 조폭이었던 그녀의 후배 한 명은 이제 페인트통을 겹쳐 들고 올레길 이정표를 정성스럽게 그리는 `길 위의 예술가`로 통한다. 대화 한 번 없던 아버지와 아들은 올레길에서 평생 나눈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되찾았단다. 그녀는 잘라 말한다. 이런 게 안티 공구리의 힘이요, 올레의 힘이라고.

 

◆ 서명숙 제3코스 : 모성

= 올레의 힘, 제주의 힘은 모성의 힘이기도 하다. 제주의 풍광은 다가오는 방식도 다르다. 가만가만 가슴에 쌓인다. 단박에 강렬한 인상을 주고 휙 사그라지는 남성적인, 강렬한 풍광이 아니다. 은근히 섹시하게 감아돌면서도 끈끈한 여성성의 맛이다. 그러니 제주에 오면 모든 게 순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각지거나 날선 것도 이내 둥글어진다. 제주 출신 서 이사장이 올레를 만든 건 어찌 보면 운명이다. 느리게 걷기를 설파하는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창립 멤버로 시간과 싸우는 정치부 기자로 15년을 보냈다. 2001년에는 여성 최초로 편집장까지 됐으니 그 속도를 짐작할 만하다. 둥근 성격도 이내 속도의 날에 깎여 날이 서고 말았다.

 

"성격 대단했지. 애칭 두 가지가 뭔지 알아. 성질 머리의 뚜껑이 잘 열린다는 왕뚜껑. 마감을 너무 쪼아댄다고 `마녀`야." 그녀는 당시를 속도에 중독된 시기로 표현한다.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말처럼 부려먹었다는 거다. 그때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단다. 그러곤 바로 사표를 던진다. 산티아고에서 보낸 36일은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속도를 알았고, 리듬을 알았다. 자연의 품을 걸으면서 자연이 주는 위안, 평안, 행복을 경험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그 여행의 마지막에 떠오른 곳은 운명처럼 고향 제주도였다. 그리고 바로 시작한 것이 올레길 찾기다. 자연의 속도를 돌려주려는 막연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후 걷기는 그녀의 후반생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된다. 둥글디 둥근 오름처럼, 알작알작 둥근 소리를 내는 알작지 해안 조약돌처럼 날 선 성격도 점점 무뎌진다.

 

"제주의 강점은 여성성이야. 그건 곧 올레의 힘이기도 하지. 화산을 품어도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유순하면서 순박해 보이는 풍광도 다 여성성 덕이지." 그녀가 말하는 올레의 사이즈는 A컵이다. 스위스 노르웨이의 B컵, C컵 같은 웅장함은 없지만 올망졸망한 아기자기한 A컵의 앙증맞음이 있단다. 자연이 너무 웅장하면 위압감이 든다. 스위스나 노르웨이의 것이 그렇다. 제주는 다르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편할 수 있는 사이즈다.

 

"제주를 봐. 370여 개의 오름 높이가 다 100~150m야. 딱 할머니 가슴만 한 높이지. 그 길은 이렇게 말해. 이 속도는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너 참 애 많이 썼다. 자 이젠 느릿느릿 이 품에 안겨봐라. 올레는 그래서 치유의 길이기도 해." 그녀는 어느새 자기가 만든 길 `올레`를 닮아가고 있다. 꼬닥꼬닥, 놀멍쉬멍 얘기를 듣다 보니 은근하게 중독성도 있다. 불쑥 격정적인 바다 같은 사연이 나오는가 하면 안개 자욱한 오름처럼 아슴아슴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련하게 올레길도 그리워진다. 맞다. 이게 그렇게 중독성이 강하다는 `올레뽕`이요, `서명숙뽕`이다. 어쩐지 기분 좋은 중독이다.

 

◆ 이여자가 사는법…TV는 없다 손빨래 한다 그리고 틈나면 편지

= 1957년 제주도 성산읍 고성리 출생이다. 서귀포시에서 쭉 자랐고 고려대(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에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2001년 여성 최초로 편집장이 된다. 걷기에 빠진 건 갑작스럽다. 속도의 삶에 찌든 2003년 시사저널에 사표를 낸 뒤 산티아고, 네팔 등을 도보로 여행하면서부터다. 이때 올레를 만들 결심을 했다. 2005년 인터넷 언론매체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영입됐지만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걷기를 위해 사직한다. 이후 30년간 서울에 살다가 2007년 귀향해 제주올레 이사장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녀가 낸 올레 관련 모든 이야기는 그녀가 낸 두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제주걷기여행-놀멍쉬멍걸으멍`(북하우스ㆍ2008년)에는 제주 올레를 낸 사연, 그리고 초창기 5~6개 코스를 낸 치열한 과정이 담겨 있다.

 

최근작 `꼬닥꼬닥 걷는 이 길처럼`(북하우스ㆍ2010년)은 올레꾼들과 올레를 만든 사람들 이야기다. 그녀는 TV 없이 산다. 벌써 2년째다. 볼 것과 챙길 것은 모두 신문과 인터넷으로 해결한다. 취미는 손빨래. 마침 방 3개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옛날 빨래터가 남아 있단다. 그는 빨래를 하며 물을 만진다. 자연을 만진다. 전기청소기도 없다. 소음을 싫어해서다. 그러니 비질을 한다. 조용히 쓱싹. 빨래와 비질 청소는 그녀에겐 피트니스센터다. 일부러 힘을 주고 안 쓰는 근육을 사용한다. 건강 비결이란다.

 

요즘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편지를 쓸 시간이 없다는 것. 물론 직접 글로 눌러쓰는 편지다. 스스로 "영혼을 기다려줄 시간도 없이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이거란다. 편지를 좋아하는 건 아마도 편지가 걷기를 닮아서일 것이다. 편지는 연필로 종이를 밀고 가야 완성되고 걷기는 몸으로, 직접 땅을 밟고 꾹꾹 밀고 가야 완성된다. 그러면서 툭 한마디. "전 얼굴만큼 글씨도 예뻐요"란다. 50줄을 넘겼지만 외모도, 글씨도 그녀가 만든 올레길을 닮아 앙증맞고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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