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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외 10인의 <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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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1. 1. 2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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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의 '정의'? 난 반댈세!
[프레시안 books] 이택광 외 10인의 <무엇이 정의인가?>

 

프레시안


2010년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준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마이클 샌델은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이 이론적 입장에 따라 매우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의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질문에 <무엇이 정의인가?>(마티 펴냄)라는 제목으로 맞받아치고 있는 11명의 한국인 필자들은 샌델이라는 한 사람의 정의론조차 도덕적 딜레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필자들은 샌델과 샌델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극대극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저자들의 직업이나 전공도 소설가부터 법학자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저자들에게서는 우선 샌델이 공동체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가 논란거리이고, 공화주의자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사회 정의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입장인지가 또 논란거리이다. 한 가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데, 그것은 샌델이 공동체주의자라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장정일·이현우·최원·박가분·김도균·박홍규·노정태·서동진·이권우 지음, 마티 펴냄) ⓒ마티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학계에서 정의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던 시절이 있는데, 소련과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였다. 당시에는 '역사의 종말'이 회자되면서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또는 공동체주의라는 서구의 정치이론과 도덕이론이 마르크스주의를 완벽하게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논의의 시작은 20년이나 이전에 출판된 롤스의 <정의론>이었고, 논의의 내용은 대체로 롤스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다양한 방향의 지적들로 채워졌다. 롤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왔는데, 하나는 공동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다양한 이론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체성의 정치'를 표방한 페미니즘 윤리학이었다.

 

당시에는 대체로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의 판정승으로 논의가 매듭지어진 듯이 보였다. 롤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으로 자신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기운 듯했다. 여기에서 롤스와 공동체주의/페미니즘 윤리학의 입장이 갈리는데 가장 중요하게 기여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하버마스이다. 하버마스는 담화윤리이론을 통해 정의가 개인들의 결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문제이며 대화와 발언, 상호이해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개인'과 '중립성', '무관심', '권리', '옳음', '규칙'이라는 자유주의적 키워드 대신에 '의사소통'과 '공감', '배려', '인정', '좋음', '참여' 등의 상호주의적 키워드가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이 대세인 듯이 보였던 당시에 한국에서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학계나 정치권 일부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그 역시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동시에 유효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부정의한' '공정사회'에 이르러서 샌델의 정의론 강의가 독서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화두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샌델의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에 대해 <무엇이 정의인가?>의 논자들은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부정의한 공정사회'라는 현재 한국정치의 역설이 정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샌델의 강의기법이나 글쓰기 재능 등도 마땅히 이유로 거론되고 있으나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정의가 갈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 책의 저자들은 대체로 정의의 문제를 크게 분배와 정치의 두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샌델은 정의를 개인의 도덕적 판단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분배와 정치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대체로 샌델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저자들 중 몇몇이 지적하고 있듯이 샌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도덕적 딜레마라는 개인적 판단문제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접근방식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몇몇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샌델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매우 비극적인 것들이고 결국은 자명하게 해결될 수 없는 논쟁적인 성질을 가진 것들이다. 최선의 선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동시에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정당화가 필요한 선택들이고, 정확히 이런 이유에서 정의론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존재한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라는 절박한 기대에서 출발해서 샌델은 정의에 대한 이론들을 도덕적 정당화에 대한 이론적 유형들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에 걸맞게 딜레마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다양한 정당화 방식 간의 대화와 참여를 주문하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지배하는 복잡한 사회, 그래서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하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점점 절박해지는 도덕적 정당화의 문제만이 샌델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국사회에 잠재해 있는, 혹은 민주화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정의에 대한 욕구가 반영되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샌델의 책과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서인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는 사실이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정의에 대한 욕구가 대체로 분배정의(계급정의를 포함하여)에 대한 요구, 올바른 정치에 대한 요구라고 보고 있다. 샌델의 이론적 입장이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지, 또 '정의'라는 단어가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극단적 평가가 공존한다. 예컨대 이택광과 장정일은 '정의'라는 기표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면 이현우 등의 몇몇 저자들은 샌델의 책이 몰고 온 '정의열풍'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서동진은 '정의'가 신자유주의 레퍼토리에 불과하다고 보고, 박가분은 '정의론'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라며 근본적인 회의를 표현한다.

 

저자들이 '정의' 또는 '정의론'이라는 표현에 공감을 하든 안 하든 현재 시점에서 정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욕구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보다는 '복지'라는 분배의 문제로 표출되고 있다. 지방선거 '무상급식' 논쟁에서 박근혜의 '생애 맞춤형 복지' 구상과 민주당의 '무상복지 시리즈',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무상보육논쟁'까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의가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 중에서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경우로는 김도균과 최원을 들 수 있다. 김도균은 공공선을 중시하는 샌델의 이론이 한국사회에 적용가능하다고 보면서도 샌델이 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정의관의 핵심을 분배정의의 문제로 보는 최원은 샌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도균은 특히 분배의 문제를 정의론과 공공성의 주제로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이 롤스의 후예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이미 90년대에 이론적으로 극복되었다고 생각되던 자유주의자 롤스의 정의론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 책에서 최원과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본질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다. 최원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에서 분배정의가 핵심이며 분배정의는 명시적으로 계급문제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급투쟁 문제를 풀 수 있는 더욱 더 복잡한 정의의 기하학적 비례식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과제"(220쪽)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 "정의는 돈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고 본다.

 

과거에 좌우이념이 대립하던 시절에 분배의 원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능력'과 '필요'였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필요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를 정당한 것으로 표방했고,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거꾸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사회를 목표삼아 자신들의 시점에서는 그 중간단계로서 '필요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필요' 위주의 사회원리를 표방했다.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표방하는 사민주의 국가들이나 사회국가들(복지국가들)에서는 '필요에 따라 일하고 능력+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혼합적 원리가 복지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앞의 '필요'가 가장 남성 개인의 필요를 말하는 젠더차별적인 것인지 여부에 따라, 또 뒤의 '필요'가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지의 여부에 따라 복지체제에 대한 다양한 유형화가 시도되었고 또 비판되었다.

 

현재 사회주의 진영은 몰락했고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능력 위주의 원리가 젠더나 출신 등의 장벽을 어느 정도 허물면서 관철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사민주의나 보수적 사회국가들에서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로 능력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필요에 따라 일하는' 필요 위주의 노동은 점차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의 기회는 수입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직무에 합당한 사람에게 샌델이 말하는 '텔로스'에 따라 분배되는 방식으로 재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로써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원리가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돌격 아래 이미 그 절반은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험한 직후인 1990년대에 들어서 이미 20년 전에 발표된 바 있는 롤스의 <정의론>이 먼지를 털고 활개 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샌델이 민주정치의 정의를 주로 '공동선과 정치적 참여'의 문제로 보고 있다면 그가 발을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뛰어넘고자 하는 롤스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사회정의에서 찾으며, 사회정의를 '만인에게 공평한 자유'와 '만인에게 공평한 기회', 즉 인권과 사회경제적 평등의 문제로 본다.

 

롤스가 사회경제적 평등을 '평등'이 아닌 '정의'의 각도에서 보는 이유는 그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입헌주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자'로 불리지만, 사실 자유주의자보다는 입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가 말하는 절차는 단순한 절차나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상적이고 (칸트의 의미에서) '이성적'인 헌법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중립'은 샌델이나 이 책에서 김도균이 말하는 것처럼 상대주의적 관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전제로 하며 '해방'의 가치를 표방한다.

 

예컨대 이 책에서 김도균은 동성애 혼인을 롤스의 '중립성' 개념에 기초해서 정당화할 경우 일부다처제까지도 정당화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샌델의 '텔로스' 개념이 더 합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① 여성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또 만일 그 사회에서 남녀 간에 자유의 불평등이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② 자유의 최소 수혜자인 여성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에 롤스의 관점에서 중립적일 수 없는 제도이다. '최소 수혜자의 최대 수혜를 전제로 한 불평등 허용'이라는 '차등의 원칙'은 '최대 수혜자의 최소 수혜'를 주장하는 신고전주의 도덕인 '겸양의 원리'와는 반대로 자유의 하한선과 평등의 하한선을 제도적으로 명백하게 규정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롤스의 원칙을 염두에 둘 때, '필요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필요'는 신자유주의 소비사회나 독재정치, 또는 신분제사회가 생산하는 과잉의 필요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를 의미한다. 즉 보편적 자유, 그리고 보편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재화(소득, 지위, 자존감, 능력개발을 위한 재화 등)의 보장을 의미한다. 또한 롤스의 '무관심' 개념 역시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알거나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관과 기회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시민적 배려와 익명성 존중을 의미한다. 즉 18세기의 해방적 가치를 '공동선'으로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롤스의 논의에는 몇 가지의 갱신이 필요하다. 보편적 인간이나 시민 개념 역시 시대적 사실인식과 관련하여 ―예컨대 시민이란 자국인에, 남성에, 가장에, 이성애자에 제한되는가? 등의 문제에서― 그 내용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주의자들과 페미니즘 윤리학자들이 사실인식과 관련된 '대화'와 '참여'의 방법론을 제안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샌델의 '텔로스'나 '미덕', '열정', '참여' 등의 개념 역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해방의 가치보다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는 데서 그친다면 낸시 프레이저가 최근 '정체성의 윤리'를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한 바와 동일하게 그것들 역시 신자유주의의 대세 속에서 오히려 악용될 여지가 더욱 크다. 샌델의 '텔로스' 개념은 기본적으로 전형적 근대 사회학자인 파슨스의 '기능'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가치관이 파슨스의 가치관보다 좀 더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홍찬숙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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