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아버지는 [ ]다
리빙센스
여자들에게 친정엄마를 떠올려달라 부탁하면 눈가에 눈물부터 맺힌다. 엄마와 딸,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모르는 것이 있어도 금세 알아차리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남자들에게 아버지를 물었다.
내게 아버지는 (내 아들의 투자자)다.
꽤나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련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 칼럼 청탁을 받고부터였다. 돌이켜보니 아버지에 대해 고뇌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며칠을 '아버지'란 세 글자를 머릿속에 넣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군대에 있을 때 피자 50판을 사들고 면회를 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던 아버지, 내 미니홈피에 몰래 들어와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던 아버지, 가끔은 그 사랑이 지나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나의 아버지. ' 돌이켜보니 난 참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자라왔더랬다.
그러다 아버지의 부재를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일 당장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 참 못되게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떠오른 게 생활 문제였다.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만 자라온 난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워졌다. 외아들이기에 더했다. "남자는 지갑이 두둑해야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며 어머니 몰래 수시로 용돈을 쥐어주셨고, 의류 사업을 하시는 터라 고가의 옷을 사주시는 데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은근히 내가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신 터라 '옷은 입어봐야 뭐가 좋은지를 안다'고 생각하신 까닭이었다. 교복이 없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강남에서도 꽤나 부잣집 아들 취급을 받았다. 혹시 오해할까 하는 염려에 말하자면, 사실 난 그리 '부잣집' 아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누리며 자란온 거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겨우 용돈 벌이나 하는 주제에 외제차까지 몰고 다니니까. 당연히 아버지가 사준 차다. 그럼에도 얄궂게 그걸 감사해본 적이 없다. 종종 '요즘은 왜 용돈을 안 주시나'라고 생각하는 못난 아들이니까.
사실 거기엔 나만의 변명거리가 있는데, 아버지 역시 그렇게 자라오신 터다. 술만 드시면 무용담처럼 하시는 말씀이라 또렷이 기억하는데, 아버지는 마당에 셰퍼드 두 마리가 뛰노는 장충동의 3층집에서 태어났고, 청평 유원지의 절반 이상이 할아버지 것이었으며, 아버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포니 자동차를 선물하셨다고 했다. 지금 하고 계신 사업의 발판 역시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거다. 그러니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걸 지금 내게 되돌려주고 계신 거다. 오히려 할아버지만큼 해줄 수 없는 게 항상 미안하다 하신다.
언젠가 만취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회사를 그만둔 내게 '생활비'라며 용돈을 쥐어주시던 날이었다. "이건 옛날에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말씀인데, 네가 아빠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넌 그냥 아빠가 해준 만큼 네 아들한테 해주면 되는 거야. 내가 할아버지한테 받은 걸 너한테 돌려주듯이. 아빤 지금 네가 아닌 내 손자한테 투자하고 있는 거다." 내가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안게 해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거기에 대고 쌀쌀맞게 벌써 뭔 손자 타령을 하냐며 '난 딸 낳을 거'라 답한 나란 아들놈이란….
- 이승률(프리랜서)
내게 아버지는 (피터팬)이다.
컴퓨터 게임을 즐기시고, 피규어를 모으는 '요상한' 취미를 가진 내 아버지. 게다가 걸 그룹을 나보다 더 좋아하신다. 나보다 더 '애'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엔 청바지를 사와 자랑하시기에 멋있다고 해드렸다. 안 그러면 꽤 오랫동안 삐치실 거니까. 근데 아버지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너한텐 안 빌려준다, 요놈아!" 이럴 땐 정말 아버지가 맞나 싶다.
-박정호(23세, 군인)
내게 아버지는 (이런 분?)이다.
얼마 전의 황당한 상황으로 답변을 대신하련다. 김정현의 < 아버지의 눈물 > 이라는 책을 읽고 갑자기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는 평소처럼 처음부터 "엄마 바꿔주랴?" 하셨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아버지가 답하셨다. "왜, 돈 필요해?" "저 돈 필요한 거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께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어서요. 고마워요, 아버지." 이윽고 이어진 아버지의 대답. "너 술 마셨구나. 엄마 바꿔주마." 이게 우리 부자지간이다. 하하.
-이윤하(33세, 공무원)
내게 아버지는 (여자친구)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왜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하루에 20, 30번씩 전화를 하시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침에 '출근 잘했냐'는 전화로 시작해 저녁에는 '언제 들어올 거냐'는 전화까지…. 아버진 날 너무 애 취급 하신다. "아버지, 저도 내년이면 서른입니다."
-배재승(29세, 대학원생)
내게 아버지는 (잔소리쟁이)다.
친구들을 보면 보통 어머니가 잔소리를 한다던데, 우리 집은 오히려 아버지가 잔소리를 많이 하신다. 일찍 들어와라, 옷이 그게 뭐냐, 공부는 언제 할 거냐 등. 심지어 얼마 전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중요한 거에 별표 안 치고 밑줄 그었다고 혼내셨다. 별표를 쳐야 나중에 중요하단 걸 알고 한 번 더 보게 된다나. '욱'하는 걸 겨우 참았다.
-박준식(18세, 고등학생)
내게 아버지는 (친구)다.
내 아버지는 굉장히 젊게 사는 편이다. 몸매 관리도 철저하시다. 그래서 옷도 같이 입는다.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사우나에 간다. 미용실도 같이 다니고, 심지어 비밀도 전혀 없다. 항상 찬밥 신세인 어머니에겐 좀 미안하지만, 아버지와 난 허물없이 지내는 '베스트 프렌드'다.
-서재현(22세, 대학생)
입가심을 위해, 긴장감을 달래기 위해, 상대를 무시하기 위해,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씹어대는 껌. 내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다. 처음에는 분명 달콤했다.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평온하게 지내온 우리 가정의 그 달콤함은 내 나이 열다섯 살,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산산조각 났다. 안방에서 주무시던 아버지와 거실 소파에서 잠든 내가 동시에 수화기를 들면서 말이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 아버지의 말소리와 뒤이어 익숙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마침 어머니는 외할머니 제사로 집을 비우셨다. 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내가 잠들었는지 확인까지 한 후 외출을 하셨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눈치 채고 계셨다고 한다. ) 아버지의 그녀는 우리 가족과 1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온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고, 그녀 또한 내 또래의 자녀가 있는 한 가정의 어머니였다. 충격이었다. 그렇게 질긴 악연의 파행이 시작된 거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신파적인 이야기라 접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막장이라 하는 TV 드라마의 내용이 절대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후 우리 가정의 막장 드라마는 7년이나 계속되었고, 이혼을 세상의 끝이라 여기던 어머니가 결국 그 끝을 택하면서 '찬란한' 종영을 맞았다. 양육비를 보장했던 아버지는 딱 두 달간 양육비를 송금하고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렇게 세상에 내던져진 어머니와 나는 먹고산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임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버지란 인간에 대한 배신과 분노, 증오를 키워갔다.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약물 치료까지 받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던 어머니의 증상은 아버지로 인해 호전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약보다 더 좋은 것이 아버지를 씹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어머니와 나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아버지를 씹는다. 우리 모자에겐 그만큼 씹기 좋은 '껌'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가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버지였다. 아무렇지 않게 대뜸 한다는 말이 네 자취방에서 같이 지내면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날려 차까지 팔고 천호동의 친구 집에서 생활한다 했다. 일단 만나자고 했다. 천호동의 한 대형 마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짝퉁 브랜드 트레이닝복 차림에 바짝 깎은 스포츠 머리.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귀 뒤로 불룩하게 오른 나잇살이 낯설게 눈에 띄었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 해장국집으로 가서 해장국을 주문하는데 아버지는 밥을 먹었다며 나 혼자 먹으라고 했다. 그래도 드시라는 내 권유를 한사코 거절했다. 입씨름이 싫어 결국 1인분을 주문했고, 덕분에 우리는 식당 주인의 뜨거운 눈총을 받았다.
나는 몇 년 만에 만난 아버지보다 남의 시선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내게 아버지는 이미 남보다 못한 이였던 거다. 그런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빈털터리가 되고 나서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엄마 탓을 하고 있었다. "그때 네 엄마가 그렇게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라는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변한 것은 없었다. '괜한 기대감을 가졌던 내가 바보지. ' 아버지와 마주하고 있는 그 시간이 싫어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먼저 성큼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참으로 보기 싫었다. 애잔함과 안쓰러움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앞서 먼저 계산을 하고 빠르게 식당을 나오는데,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저 더러운 성질 하나도 안 죽었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짜증 섞인 찝찝함이 온몸을 감쌌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때마침 소식이 궁금해 걸려온 엄마와 통화를 하며 애써 감정을 외면했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신나게 씹어대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입이 텁텁해서 여느 때처럼 껌을 꺼내 씹었다. 무미건조하게 기계적으로 질겅질겅. '누가 계산하든 그게 무슨 문제기에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나 참 기가 차서. ' 3천5백원짜리 콩나물 해장국이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임을 깨달은 건 씹던 껌의 단물이 다 빠져나갈 때쯤이었다.
- 이정대(구성작가)
내게 아버지는 (업보)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 건 지난 IMF 시절. 아버지의 사업은 결국 부도를 맞았고,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가 지은 빚을 아직도 내가 갚고 있다. 원망해본 적은 없지만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다.
-최종민(35세, 회사원)
내게 아버지는(원망)이다.
삼형제 중 둘째였다. 형은 나와 두 살 터울이었고, 동생은 열 살이나 어린 늦둥이였다. 형은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특혜'를 받았고, 동생은 나이가 어려 '오냐오냐' 키우셨다. 항상 난 뒷전이었다. 자라면서 그런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문덕수(40세, 자영업)
내게 아버지는 (부담)이다.
제발 이제는 내가 공부로 대성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주셨으면 좋겠다. 만날 서울대, 서울대 하시는데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다. "아버지, 지금 제 성적으로는 절대 서울대 못 갑니다."
-곽성민(18세, 고등학생)
내게 아버지는 (족쇄)다.
내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국회의원이다. 때문에 내 이름 앞에는 언제나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남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하지만, 난 그게 부담스럽다. 아버지에게 합당한 아들이기 위해 삼수를 해야 했고, 마음에도 없는 사법고시를 수년째 준비 중이다. 제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나로 살고 싶다.
-홍태영(28세, 고시생)
내게 아버지는 (무존재)다.
아버지와 말을 섞은 지 10년이 넘었다. 심지어 한 집에 살면서 말이다. 처음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건 한창 반항하던 사춘기 때였는데, 어느새 그게 익숙해져 버렸다. 아버지 역시 그러신지 얼굴을 마주쳐도 별말이 없으셨다. 그냥 이게 편하다.
-오규한(29세, 서비스업)
내게 아버지는 (거울)이다.
내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입력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는 웃을 일이 별로 없었던 분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의 맏아들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 세 어른과 밑으로 세 동생을 돌봐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 식솔들을 이끌고 아버지는 태평양전쟁과 6. 25전쟁을 겪으며 세파를 헤쳐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잔정을 표시하는 일도 없고, 긴 이야기를 하신 적도 없다. 아버지와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늘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무렵의 공무원은 기아선상의 봉급을 받았다. 곧고 고집스러운 아버지는 봉급 이외에 돈을 만드는 재주가 없었다.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가불한 것을 빼면 남는 것이 없었다. 집안은 늘 가난했고, 학교 수업료를 제때 낸 기억도 별로 없다. 나는 가난이 싫었고,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월급을 주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업신여겼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반면교사였다. 나는 아버지처럼 문학도 예술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식들에게 무뚝뚝한 아버지가 되지도 않을 것이며, 몸도 약골인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고리타분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는 공무원은 더더욱 할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 상급반이 되면서 진학 문제가 나왔을 때 아버지는 법과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집했다. 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공무원이 되는 것 못지않게 따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도 젊었을 때 일본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는 의외의 고백을 하시면서 내 고집을 받아들이셨다. 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요구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계급 정년으로 조기 은퇴를 하셨다. 공무원 출신이 살기에 세상은 너무 험했다.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손대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세상을 조금 알게 된 나는 아버지에게 깊은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꼈다. 신문기자의 월급봉투도 공무원 못지않게 얇았다. 나는 이 봉투로 식솔들을 부양하는 책임을 떠맡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신문기자로 출입하던 태평로 국회의사당과 중앙청은 모두 아버지가 직장생활을 하시던 곳이었다.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던 나는 아버지가 일하시던 건물에 공무원이 아닌 신문기자로 드나들게 된 것이다. 유신 시절 정부의 언론 탄압은 극심했고, 나는 별 미련 없이 언론계를 떠났다. 여러 해 동안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다 결국 다시 방송사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생활이 안정이 좀 되는가 싶었는데, 사장이 장관으로 가면서 비서관으로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나는 거듭거듭 완곡하게 거절했다. 결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의 강력한 권유로 등을 떠밀려 장관을 따라갔다. 계속 공무원이 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장관은 나를 공보국장으로 발령냈고 얼떨결에 공무원이 되고야 말았다. 나는 쓴 약을 마신 기분이었지만 아버지는 기뻐하시면서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그렇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을 50대 중반까지 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아버지가 은퇴한 나이와 거의 비슷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거울 속에 반백의 머리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은 노령의 아버지 모습과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했던 나는 결국 아버지가 밟은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그 모습까지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신우재(자유기고가)
내게 아버지는 (시시포스의 바위)다.
아버지를 뛰어넘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그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에는 아버지란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고 있다.
-조진혁(28세, 프리랜서)
내게 아버지는 (닮은꼴)이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무모한 사업에 손을 댔던 아버지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는 얼마 전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우고 프리랜서의 길로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어쩜 그렇게 네 아버지를 빼다 박았냐"며 기겁을 하시더라. 물론 외모도 참 많이 닮았다.
-김지훈(31세, 프리랜서)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다.
내 아버지는 암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셨다. 항암 치료의 고통을 참아내시면서도 아픈 내색 한번 안 하셨던 아버지. 자식들 몰래 묏자리까지 다 봐놓고 돌아가신 걸 보면서 '아버지는 죽음의 길에서조차 참 아버지답고자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떠나는 길에도 자식들에게 짐을 남기긴 싫으셨겠지…. 나도 자식들에게 그런 아버지이고 싶다.
-이원선(52세, 개인 사업)
내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다.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아버지가 일곱 남매를 다 시집 장가 보내기까지, 그의 삶은 대체 얼마나 치열했을까. 나는 하나 보내기도 이렇게 버거운데….
-이재문(58세, 요식업)
내게 아버지는 (스승)이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내가 두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전부다. 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치셨고, 유난히 트럼펫을 잘 부셨다는 나의 아버지. 하지만 내게 아버지는 음악 스승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아 작곡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한울(22세, 대학생)
1994년경이었던 것 같다. 모태신앙이 불교인 탓에,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진두지휘하에 의무적으로 절에 들러야 했다. 그때 아마 양산 통도사의 '화엄살림'이라는 기도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을 거다. 물론 본격적으로 법회에 참가하는 건 어머니뿐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주로 한가로이 걷거나 자동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참, 먼저 언급해야 할 건 내가 집안의 '막둥이'란 점이다. 35년생인 아버지를 두었고, 당신의 연세 마흔에 난 세상 빛을 보았다. 위로는 열여섯 살, 열두 살 차이가 나는 형들이 있다. 아무튼 통도사 옆 시냇물 소리가 꽤나 청량했던 계절에 나는 차 속에서 아버지의 지난날에 대해 듣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내 뺨으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물론 그 당시의 이야기가 억척스럽게 살아온 삶에 대한 것도, 억울하게 지내온 나날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지난날이 꽤나 코믹하다고 생각한다. 경북 문경 출신인 당신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대구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더랬다. 당신은 일제 강점기 후반을 거쳤고, 한국전쟁을 보낸, 그러니까 한국 근대사를 관통해온 장본인이었던 거다. 그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물론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그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면 행여 지어낸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한국전쟁 피난길에 올랐던 중학생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징병에 끌려갈 뻔했다고 했다. 시쳇말로 당시에 '깔롱(멋부린다는 표현)' 좀 부렸다며, 그 절박한 피난길에 당시 유행했던 (얇은 생고무 밑창이 있고 천으로만 만든) 권투화를 신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배꼽 잡을 일이었다. 대학 시절엔 누구보다도 영화를 좋아했고, 급기야 배우 오디션에까지 도전했다고 했다. 요 부분이 조금 믿기지 않는데, 당신과 같은 오디션에서 선발된 이가 바로 신성일이었다는 것.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면 당신은 진짜라고 버럭 언성을 높이시니 그냥 믿기로 했다.
또 대학 시절 명동의 한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고 했다. 난 모계의 영향으로 타고난 음치지만 당신은 노래 한 가락 잘 뽑아내는 쪽이다. 그래서인지 가수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유명한 작곡가 선생의 집에 한 달가량 허드렛일을 하며 죽치고 있었다고. 물론 할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머리채 끌려 나오긴 했지만. 자유당 시절이었던 당시 당신은 군복무도 시쳇말로 '나일론 환자' 역을 하며 의가사 제대를 했다. '빽'이란 게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나름 파란만장했던 청춘사를 듣는 동안 난 당신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아파왔다.
1994년의 나는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이었고, 어쩌다 입학한 공과대학에서 학업 대신 영화학과 수업에 몰두하며 영화 동아리 활동에 집중했다. 어린 시절부터 당신의 영향으로 영화라는 미디어를 꿈꾸어왔다. 대학원에 가서야 영화를 공부할 수 있었고, 현장으로 진출하려던 꿈을 잠시 접고 영화 전문 기자로 일했다. 그러니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영화감독'에의 꿈이 잔존해 있다. 물론 연출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충무로에 뛰어들어 배고픔을 견디며 미래를 꿈꾸겠다는 이야긴 아니다.
그날 청량한 공기를 맡으며 당신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 언젠가 가시기 전에는 꼭 모든 내용을 다시금 녹취해 이야기로 풀어내겠다"고.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은 당신일 것이라고. 올해로 당신은 일흔일곱.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난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올여름 휴가 즈음엔 고향에 내려가 당신 옆에 녹음기를 두고 그 유쾌했던 청춘사를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 그것이 17년 전에 머금은 눈물을 미소로 바꾸는 전환일 테니 말이다. '아버지, 내게 당신은 내 영화의 영원한 주인공입니다. '
-이주영( < arena > 에디터)
내게 아버지는 (세상의 '피해자')다.
아버지는 모 대기업의 CEO이셨다. 한마디로 잘나가셨던 분이란 거다. 그런데 아버지도 명예퇴직의 바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이유는 설명하자면 긴데, 확실한 건 부당하다는 것. '다 쓰러져가는 계열사에 보내놓고 그 회사를 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직을 당하셨으니…. ' 그 이후로 수개월째 집 밖 출입 자체를 안 하신다. '한평생을 회사에 충성하셨는데…. ' 집에 우두커니 계신 아버지를 보면 안쓰럽기만 하다.
-김승진(34세, 회사원)
내게 아버지는 (후회)다.
얼마 전 아버지가 꿈속에 나왔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난 용돈 10만원을 드렸다. 꿈에서 깨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왜 고작 10만원이었을까. 1백만원, 1천만원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살아생전 못해드린 것이 많아 후회만 남았다.
-진종우(51세, 개인사업)
내게 아버지는 (두려움)이다.
아버지에게 많이 맞고 자라서일까. 머리가 컸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무섭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하지 않은 일에 회초리를 든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즘도 아버지 앞에만 서면 두려움이 먼저 생긴다. 아버지가 말을 걸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고.
-신경우(26세, 취업 준비생)
내게 아버지는 (그리움)이다.
TV 드라마 등에서 쫓겨나는 어머니를 본 적은 있을 테지만, 쫓겨나는 아버지는 생경할 거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적어도 내 기억 속엔) 집에서 쫓겨나셨다. 부유한 가정의 어머니와 가난한 아버지는 오직 사랑 하나로 외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셨지만 결국 그 끝은 반 강압적인 이혼이었다. 이혼을 '당하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외갓집 문을 발로 차던 그 발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외할머니가 부른 경찰에 끌려가시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은 지금도 내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 뒤로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제 자식인데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까,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 이런 원망도 든다. 외갓집에 얹혀살고 있는 주제에 할 소리는 아니지만, 가끔 진심으로 아버지가 그립다.
-고태영(36세, 자영업)
내게 아버지는 (초코파이)다.
아버지는 약주를 하시면 늘 초코파이를 사 오신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늘 다른 군것질거리들을 사주시지만, 아버지는 늘 한결같다. 오죽하면 아버지를 생각하면 초코파이부터 떠오를까. 사실 난 '올드한' 초코파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중원(17세,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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