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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당기는 우리말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11. 7. 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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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맛밥, 지에밥, 대궁밥, 기승밥, 밥맛 당기는 우리말

 

[출처 : 말글살림]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밥상에는 그 맛만큼이나 구수한 우리말이 널려 있다. 예쁘고, 정겹고, 맛깔스런 우리 토박이말의 행진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때부터 시작하여 밥 짓고, 국 끓이고, 김치 담그고, 나물을 무치는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과정 내내 이어진다. 끓이고, 삶고, 지지고, 볶아 만든 음식이 가득 차려진 우리의 밥상은 입맛 당기는 우리말의 진수성찬이나 다름없다. 어느 나라 사람들을 막론하고 먹을거리의 대줄거리는 곡식과 채소, 그리고 가끔씩 먹던 고기다. 우리 겨레가 주로 먹어온 곡식은 흔히 오곡(五穀)이라 일컫는 쌀, 보리, 콩, 조, 기장 따위다. 그 중에서 으뜸인 쌀로 밥을 지어먹는다.

 

한편 우리 겨레는 갖가지 채소와 풀로 김치나 나물처럼, 굉장히 가짓수가 많은 밑반찬을 만들어 먹어 왔다. 여기에 갯벌이나 바다에서 난 조개와 생선, 해조류 따위가 곁들인다. 물론 가끔씩 소, 돼지, 닭, 오리 고기 따위도 먹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처럼 먹을거리 가짓수가 많은 겨레도 없을 터다. 따라서 거기에 붙여진 우리말의 가짓수가 많은 것은 당연지사다. 논에서 부엌을 거쳐 밥상에 이르기까지, 입맛 당기는 우리말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지어진 상태에 따라 당긴 모양에 따라
우리는 하루에도 두세 번쯤은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산다. 특별한 날에는 쌀로 떡을 빚어 먹기도 한다. 그럼 쌀은 어디에서 나는 걸까? 이 물음에 '쌀나무'라고 답하는 사람은 가히 '도시촌놈'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쌀나무는 없다. '벼'라는 식물이 있을 뿐이다. 모판에 뿌려진 볍씨가 어느 정도 자라면 모내기를 한다. 여름 내내 물과 햇볕과 바람을 흠뻑 먹고 빳빳하게 자란 벼에서는 황금빛 열매가 알알이 달린다. 그게 '나락'이다. 가끔 나락을 쌀의 사투리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벼의 열매는 나락이고, 그 나락 껍질을 벗긴 게 쌀이다.

 

쌀의 품종은 많다. 하지만 그 가짓수는 크게 '찹쌀'과 '멥쌀'로 나눌 수 있다. 밥을 짓거나 떡을 빚었을 때 끈적끈적한 찰기가 많은 것은 찹쌀이다. 그렇지 않은 쌀은 멥쌀이다. 멥쌀로 만든 떡은 포슬포슬하고 찹쌀로 만든 찰떡은 쫄깃쫄깃하다. 또 같은 쌀이라도, 오래된 '묵은쌀'보다는 갓 추수한 '햅쌀'이 맛이 좋다.

 

쌀을 솥에 안쳐 지은 게 밥이다. 밥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가마솥에 지은 밥은 '가맛밥'이다. 그런데 쌀을 물에 불려서 시루에 찐 밥은 '시루밥'이 아니라 '지에밥'이라 한다. 지에밥은 그냥 먹기 위한 밥이 아니라 다른 먹을거리를 만드는 데 밑이 되는 밥이다. 예컨대 찹쌀로 만든 지에밥을 떡메로 쳐서 늘인 다음에 썬 것이 바로 인절미다.

 

지어진 상태에 따라 밥을 부르는 말도 다르다. 물기가 많아서 질게 된 밥은 '진밥'이다. 반면 되게 지어져 고들고들한 밥은 '된밥'이다. 된밥 중에서도 아주 꼬들꼬들한 밥은 '고두밥'이다. 옛적에 나이 많은 시부모에게 고두밥을 지어 올려 소박맞았다는 며느리의 눈물겨운 사연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하다. 한편 솥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그대로 긁어낸 것은 '누룽지'다. 그런데 가마솥에 물을 부어 불린 다음에 긁은 것은 '눌은밥'이다. 이처럼 누룽지와 눌은밥은 엄연히 다르다.

 

그릇에 밥이 담긴 모양에 따른 이름도 있다. 먼저 그릇 위로 소복하게 올라오도록 담은 밥은 '감투밥'이다. 그런데 감투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남기는 때도 있다. 그렇듯 먹다가 남긴 밥을 '대궁밥'이라 한다. 쌀이 모자라던 옛적에, 남의 집에 가서 쌀밥을 대접받은 손님은, 그 집안의 배고픈 누군가를 위해서 일부러 대궁밥을 남기는 게 예의였다고 한다.

 

밥을 어디에서, 또 어떤 상황에서 먹느냐에 따라서도 그 이름이 다르다. 감옥에서 먹는 밥은 '구메밥'이다. '구메'는 옛말로 구멍이다. 감옥의 좁은 구멍으로 넣어준 밥이라는 뜻이다. 또 농부들이 들에서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먹는 밥은 '기승밥'이다. 집안이 기울어, 남의 집에 곁들어 드난살이하면서 먹는 밥은 '드난밥'이다. 눈칫밥과 같은 드난밥은 한마디로 눈물에 젖은 밥이다.

 

지금은 남아도는 게 쌀이어서 대궁밥 놓고 다툴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기후변화가 무쌍한 시대에 단 한 번의 흉작으로 쌀 생산에 큰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다. 다행히도 아직 우리는 날마다 쌀로 지은 밥을 먹고 또 먹는다. 그래도 물리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살림'이란 '쌀'이 우리 몸의 '살'로 바뀌는 과정이어서 그런 것일까.

 

남새와 푸새, 우거지와 시래기
김치나 나물 반찬만 올라온 밥상을 앞에 놓고 '풀밭'이라고 투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기름기 흐르는 고기반찬보다는 손끝으로 정성스레 무쳐 나온 나물 따위가 훨씬 건강에 좋다. 단백질 섭취는 콩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충분하다. 그래서 한가위나 설날과 같은 명절 차례 상에도 나물 세 가지는 기본으로 치는 전통이 아직 살아있다. 또 정월대보름엔 오곡밥과 함께 갖은 나물을 반찬으로 먹는다. 겨우내 갈무리해 둔 시래기, 우거지, 오가리 따위를 갖은 양념을 하여 고소한 들기름을 쳐서 무쳐내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김칫거리나 나물거리가 되는 채소를 우리말로 '푸성귀'라 한다. 또 밭에서 사람이 가꾼 푸성귀는 '남새', 들에서 저절로 자란 푸성귀는 '푸새'로 갈라 부른다. 그러니까 밭에 심은 배추, 무, 상추, 시금치 따위는 남새고, 산과 들에서 나는 냉이, 씀바귀, 두릅, 취나물, 쑥 따위 푸성귀는 푸새다, 남새는 '나물+새'를, 푸새는 '풀+새'를 줄인 말이다. 남새와 푸새 등 푸성귀는 갓 뜯어와 싱싱한 것을 그냥, 또는 살짝 데쳐서 무쳐 먹는 게 제맛이다. 하지만 푸성귀가 나지 않은 겨울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게 '우거지'와 '시래기', 그리고 '무말랭이'나 '오가리' 따위다.

 

그런데 우거지와 시래기는 어떻게 다를까? 먼저 우거지는 김장을 하기 전에 배추나 무 따위를 다듬을 때 나온 겉대나 무청을 말한다. 우거지는 삶아서 된장국을 끓여먹거나 살짝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남은 우거지를 짚으로 엮어서 겨우내 시들시들하게 말린 것이 시래기다. 한편 오가리는 가지나 호박, 무 등을 길쭉길쭉 썰어 오글오글하게 말린 것을 부르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무를 썰어 말린 오가리는 '무말랭이'라 부른다. 워낙에 흔히 해먹는 것이라, 무를 말렸다는 뜻 그대로 무말랭이다.

 

지난 설날을 앞두고 차례 상에 올릴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평소보다 두세 배나 비싼 고기값 때문에 마음이 묵직했을 터다. 명절을 앞두고 물가가 오르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설밑 고기값은 이미 도를 넘어선 터였다. 관측 이래 가장 춥고 가장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온도계의 붉은 수은주는 끝없이 추락했다. 무더기로 쌓인 눈은 좀처럼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혹한 속에서 '구제역(口蹄疫)'이라는 가축 돌림병이 급속도로 번졌고, 그 때문에 수백만의 숨탄 것들이 땅속 떼무덤 속으로 묻힌 까닭이었다.

 

그 살풍경 속에서도 설날이 다가왔다. 구제역의 공포와 혹한의 날씨도, 설을 맞아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발걸음은 막을 수 없었다. 천정을 뚫고 치솟는 물가도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구제역이라는 재앙은 인간이 오로지 먹기 위해 가축을 대량으로 사육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옛날 서민들은 명절이나 제사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고기를 맛보기 어려웠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직접 불에 구워먹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고기 몇 점을 넣고 흥건하게 끓인 국물을 떠먹다가 어쩌다 살점 하나라도 건지면 횡재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가축은 더 이상 가축(家畜)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질병에 매우 취약한 상품 말이다.

 

혀끝에 감칠맛 도는, 연하고 부드러운 고기를 싸게 먹으려 애쓴 우리 모두는, 구제역으로 죽어간 숨탄 것들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기회에 육식을 대폭 줄이고, 고기가 있던 자리에 다양한 잡곡과 푸성귀를 놓았으면 한다. 영양 섭취는 걱정할 필요 없다. 푸새와 남새, 그리고 우거지와 시래기 따위만으로도 한겨울을 거뜬히 견뎌낼 수 있다. 마음이 열리면 풀로 조물조물 무쳐 놓은 나물이 고기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환경과 생태계를 지킨다는 뿌듯함은 덤이다. <글쓴이 박남일>

 

글을 쓴 박남일 님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썼다. 지금은 해남에서 우리말글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하면서 지역 생태 환경을 지키는 활동도 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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