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태 타계..민주화운동 큰별 지다
연합뉴스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재야운동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고, 제도정치권 입문 후에는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통한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ㆍ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 때부터 1979년 10ㆍ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의 김근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이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도 역사적 용서를 했다.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94년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반면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은 당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재야 및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라는 세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ㆍ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고문은 지난달말 건강이 악화해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입원 치료 중인 지난 8일 딸의 이틀 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억측을 피하기 위해 파킨슨병 투병 사실까지 공개하며 재활 의지를 다졌지만 결국 합병증이 겹쳐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날 가족과 민주통합당의 이인영 최고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모차르트_-_레퀴엠_中_진노의_날-dkdlel6625.mp3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일대기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끔찍한 고문 고발하고 '세계의 양심수'
[한겨레]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 국민연금 주식투자 막아내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해 12월19일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김근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는 전기고문 때 발뒤꿈치에 생긴 주먹만한 상처 딱지를 수거해 감옥에 따로 보관했다. 그해 12월13일 접견온 이돈명 변호사와 목요상 의원에게 상처딱지를 건네려했지만,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끝내 중요 증거물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망가진 신체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법원에 낸 '신체감정 증거보전' 신청도 정권의 압력으로 기각당했다.
그러자 부인 인재근이 투쟁을 이어갔다.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로부터 고문의 실상을 기적적으로 잠깐 들은 인재근은 이 사실을 감옥 밖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이미자 노래테이프 중간에 고문 내용을 녹음한 다음 이를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즈 등에 크게 보도됐으며,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그는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재야의 대표적 인물이던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기품을 유지했다. 항상 진지하고 정직한 그에게 동료들은 "국제신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1999년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백봉신사상'에 선정되고, 같은 해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에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자주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를 얻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김근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때는 김근태는 당시 대통령 노무현과 맞서기도 했다. 노무현이 그해 4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항의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정부의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에 반대해 김근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해내겠다"며 국민연금 지키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을 휩쓴 '반 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김근태는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18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독재실상 전세계 알린 ‘김근태 고문사건’ 민주화 불 지펴
경향신문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민주화 운동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세상을 뒤흔든 '고문 사건'이다. 이 일은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르고, 독재정권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 고문은 1985년 9월4일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열흘간의 구류가 풀리자마자 '남영동'(치안본부 대공수사단)으로 끌려갔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바로 옆방인 515호였다. 공개적 민주운동 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인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 리더였던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9월4일부터 26일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23일 동안 전기고문 8번, 물고문 2번을 당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고문을 주도했다. 광기어린 고문에 김근태는 끝내 항복하고 만다. 김근태는 "고문자들의 모습은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질질 침을 흘리는 털빠진 승냥이들 같았다"고 했다. 지옥 같은 고문에도 김근태는 고문관들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외웠다. 김근태는 그해 12월 법정에서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다.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근태는 26일 남영동을 나온 뒤 검찰 청사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인 인재근을 "기적적으로" 잠깐 만났다. 발과 팔뒤꿈치의 찢어진 상처, 발등에 시꺼멓게 탄 전기고문 상처를 보여줬다. 인재근은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가수 이미자씨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녹음한 뒤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외국으로 내보냈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은 김근태 고문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세계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했다. 김근태와 인재근은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했다.
대법원은 김근태 고문에 가담한 경찰 4명에게 1993년 12월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근안은 11년간 도피하다 1999년 10월 자수했다.
▶◀ 언론인이 인정한 김근태 ‘진정성의 힘’ (0) | 2011.12.31 |
---|---|
▶◀독재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얘기한 ‘세계의 양심수’ (0) | 2011.12.30 |
“변화 일으키는 건 생각이 아니라 마음” (0) | 2011.06.30 |
노종실록 (0) | 2011.05.05 |
어떤 판사의 판결 (0) | 2011.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