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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얘기한 ‘세계의 양심수’

한라의메아리-----/주저리주저리

by 자청비 2011. 12. 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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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얘기한 ‘세계의 양심수’

 

경향신문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고 궤적이었다. 5년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 26번의 체포, 7번의 구류, 사선을 넘나들었던 고문…. 독재가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희망을 얘기했다. 64년에 맺은 그의 생은 민주주의자, 평화의 기록이었다.

 

■ 강제징집된 12남매의 막내

 

김근태는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2남매의 막내였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친은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강제로 그만두게 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 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민련 집행위원장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역정이 시작됐다. 1967년 상대 학생회장으로 뽑힌 김근태는 9월 3선개헌 반대 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김근태의 친형인 소설가 김국태(2007년 사망)는 1970년 발표한 단편 < 물 머금은 벌 > 에서 데모의 주동자로 강제징집돼 형이 훈련소로 아우를 전송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우'는 '형'에게 "비록 내가 이처럼 부당하게 끌려가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에 후회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여섯 명의 형·누나는 어릴 때 숨지고 그 다음 세 형은 6·25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12남매 중 10번째인 김국태가 사실상 집안의 맏이 노릇을 했다.

 

■ 수배생활의 벗이 된 인재근

 

김근태는 1970년 제대하고 복학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김근태는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번째 도피 생활을 한다. 이 사건으로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이들의 공소장에 표현한 '공소 외 김근태'는 그의 별칭이었다. 19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 생활을 했다. 1970년대 어느 겨울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시간을 넘겨 서울 도곡동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자리뛰기로 찬바람과 맞섰지만,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피신 상태에서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형윤 상대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는 도피 중이던 1977년 8월 당시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 중이던 이화여대 출신 인재근을 만나 결혼했다. 1977월 5월 김근태가 6세 연하인 인재근에게 서울 광나루의 선상 매운탕집에서 "나랑 결혼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다.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좋았다"고 했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냈다. 말을 배우고 가장 많이 한 말이 "양심수 석방"이라고 하는 그는 김근태의 '민주화 동지'였다.

 

■ 고문과 투옥의 1980년대

 

◀ 2002년 1월 김근태 당시 민주당 고문(가운데)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김근태)이었다.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았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다. 공안당국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1987년 대통령선거를 경주교도소에서 맞이했다.

 

선거 결과가 궁금했다. 선거 당일 자정이 넘어가자 교도관에게 결과를 물었다.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패배였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분열'에 따른 패배에 절망했다. 1988년 6월30일 야당이 앞선 총선에서 승리하자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에 따라 2년10개월 만에 석방됐다.

 

김근태는 1987년 대선 전후로 분열된 재야를 다시 결집하기 위해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자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1992년 8월까지 옥살이를 시켰다.

 

■ 시작도 끝도 비주류였던 정치

 

김근태는 1995년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27년간 3대 독재 정권에 걸친 '재야 운동가'에서 제도권 정치인이 됐다. 그해 9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재야 인사들을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세력, 민주정통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복권되지 않아 15대 총선 출마가 불투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가 강력하게 김근태의 복권을 요청했고 김 대통령이 결국 받아들여 15대 총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됐지만 김근태는 강한 개혁 성향으로 '비주류 정치'를 시작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근태는 2001년 9월 당 대표 선임을 둘러싸고 "당 위에 군림하는 특정계보가 있다"며 동교동계 해체를 촉구했고, 이에 권노갑 전 고문이 "동교동계는 민주당의 뿌리이고 역사"라고 발끈하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노무현 후보와 '개혁후보 단일화'를 조율했지만 실패했다.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를 잡지 못하고 그해 3월 후보를 중도 사퇴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 2008년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진중권 당시 중앙대 겸임교수(왼쪽)가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을 인터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집권 후 노 대통령과는 자주 충돌했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당 복귀 후에는 2006년 6월부터 8개월간 침몰하던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다.

 

■ 평생을 괴롭힌 고문 후유증

 

김근태는 17대 대선에 다시 도전했지만 2007년 6월 도중에 사퇴했다. 건강도 포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의 몸은 온전치 않았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등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2001년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그에게 측근들은 고음으로 연설할 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코 수술을 하라고 했다. 수술대에 누운 김근태의 눈에서는 의사가 마취를 시작할 때 눈물이 흘렀다. 김근태는 수술 후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치과의 시술용 의자가 전기고문을 받던 의자로 연상돼 치과에 가기를 꺼린다. 특정 비누도 쓰지 않는다. 물고문을 당할 때 그 비누 냄새가 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물고문 후유증으로 만성 비염을 달고 살아 늘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2007년 12월에는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의학적으로 고문과 파킨슨병의 인과관계가 밝혀진 것은 없다고는 하나 고문이 원인일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파킨슨병은 약물로 완치되지 않는다.


■ 희망을 말하며 늘 부족함이 많다던 그가 떠났다

 

김근태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했다. 김근태조차 '반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 신 후보가 뉴라이트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지막 화두는 야권통합이었다. 김근태는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대통합을 주창했다. 지난 3월 민주당 내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정당 인사들과도 접촉하며 대통합을 역설했다.

 

김근태는 '희망'을 얘기했다. < 희망의 근거 > < 희망은 힘이 세다 > 등 책에도 '희망'이 들어간다. 김근태에게는 "(1980년대) 죽음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이 있었다. 블로그에 적은 세 가지는 '정직한 나라(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동아시아연합)'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항상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욕심 같은 바람은 '생각의 사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입니다."

 

 


강금실 전 장관 추도사

김근태 선배님.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제가 선배님 추모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요. 너무 빠릅니다. 슬퍼요. 그냥. 웁니다. 죽음이 문득 우리 앞에 들이밀어준, 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애의 지나감을 바라보면서. 속상하고 아리지요. 국가라는 이름으로 선배님 몸에 깊숙이 상처를 남긴 물과 불의 고문 흔적들…. 그 트라우마를 안고서도 소년같이 해맑고 선량하게 웃으시던 선배님 모습이 어른거려서, 잊고 있던 폭력의 기억이 불쑥 그 흉측한 정체를 드러내어 가슴을 후려치듯 에게 합니다.


저, 여기서 역사라는 것,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님 당신,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며 대부이셨다는 것. 그 고문의 후유증이 이렇게 일찍 선배님 떠나보내게 한다는 것. 그런 것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서럽습니다. 우리 이렇게밖에 살지 못한다는 게,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어놓고서 그 권력으로 우리 서로를 물어뜯고 심지어 이렇게 가혹하게 상처내고 죽여버리는 역사가 반복될 뿐이라는 게 서글프기만 합니다.

 

저, 사실 선배님의 민주화운동 후배도 아니지요. 나중에, 열린우리당이 기울어갈 무렵, 제가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할 무렵 가까이 뵈었지요. 인재근 선배님이 제 선거 후원회장도 맡아주셨지요. 어쩔 수 없나봅니다. 싫어도, 힘들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 역사라는 게, 저를 이렇게 선배님과 가까이 만나게 했나봅니다.

 

저, 사실, 선배님 말씀 자주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항상 맑고 부드럽고 온화하셨지요. 언제나 나라 걱정에 진지하셨고요. 흥분하는 법도 화내는 법도 없으셨지요. 저를 부르시면서 우리 어떻게 하지 하며 시국을 걱정하셨지요. 저, 힘들었습니다. 참담했고요.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겨울에 선배님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가면서 저 많이 착잡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뭔가 해야 할 숙제를 못하고 선생님 면담하러 가는 느낌이었어요. 선배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다시 저를 불러 우리 어떻게 하지 하는 그 말씀을 건네주시는 것 같았어요.

 

선배님은 한순간도 역사를 향한 겸손한 성실함과 헌신의 자세를 놓지 않으셨지요. 선배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다시 그 진지했던 고뇌를 상기시켜주셨어요. 병실에 누워 계신 선배님 손 붙잡고 기도드렸지만, 소리내어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선배님, 걱정마세요. 잘할게요. 열심히 해볼게요. 무어든. 선배님이 사랑하신 사람들과 이 서글픈, 그러나 우리 함께 책임지고 만들어가야 하는 역사라는 것을 위해서.

 

김근태 선배님, 병실에서 만난 우원식 전 의원이 "세상이나 좀 나아지는 것 본 담이라야…" 하며 말을 못 잇더군요. 민주화운동세력이 정권을 잃어버린 후 증오와 분노로 변해가는 이 사회적 정서도 마음이 아프지요. 제가 이럴진대, 선배님은 어떠셨을지.

 

죄송합니다. 선량하고 아름답고 진지하였던 한 거룩한 생애의 인간, 마지막 가시는 그 길에 더 평화로운 세상, 더 기쁜 세상, 그걸 마음에 가득 누리게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김근태 선배님, 선배님은 역사이셨지요. 그리고 역사 앞에서 진실했고, 항상 마음이 우리 안에 계셨지요.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을 기억하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더 사랑하고 끌어안으며 사람다움에 부끄럽지 않게 가겠습니다.

 

하느님, 정녕, 하느님이 계시다면 살아서 조국의 폭력을 몸소 맞으며 아파했던 이 사람 김근태가쯔리아(세례명)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이 아름다운 한 사람의 영혼을 거두어주소서. 살아서 편히 쉬지 못했던, 세상의 고통을 몸소 짊어졌던 어린 양, 당신께서 몸소 희생으로 쓰임을 다하게 하셨던 이 아름다운 영혼을, 평안히 거두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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