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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또 이런 사람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14. 1. 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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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가 화제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기사가 나간후 인터뷰어도 화제가 되고 있다. 두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한겨레
| 2014.01.05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140104094006139

 

386의 무용담은 사양합니다

한겨레 | 2013.05.24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여야 망라한 정치권 386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99년 만든 '제3의 힘' 참여
2000년 룸살롱 사건으로 해체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가다
"일단 살아남아 힘을 갖자"고
미친듯이 달려오기만 한 386들
옛날에 뭐 했는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한겨레> 토요판에 '엄마의 콤플렉스'를 연재하는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는 한때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의 실무위원으로 인터넷 홍보를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제3의 힘'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첫 번째 서울대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정우 변호사를 중심으로 김영춘, 송영길, 정태근, 우상호, 이인영, 고진화, 천호선, 김서용 등 여야를 망라한 이른바 '386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1999년 창립한 정치운동 단체입니다. "썩어빠진 구정치"를 대체할 주역임을 자부했던 이 단체는 "독자적인 정당 건설을 몇 년 뒤로 미루되, 2000년 총선에서 국회 진출을 원하는 회원의 경우 나중에 '제3의 힘'으로 원대복귀하는 것을 조건으로 출마를 허용한다"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마련했을 정도로 현실 정치 참여를 자신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5·18 전야제 후 일부 젊은 정치인들이 벌인 술자리가 임수경씨에 의해 '제3의 힘' 게시판에 폭로된 데 이어, 이정우 총무와 실무위원 전원이 게시판 글 삭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이 조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허무한 결말이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 코너에 유난히 자주 등장했던 그 세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 저는 마침 이진순 교수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몇 년 전 어느 학술발표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제대로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감히 해결책을 마련해줍네 마네 끊임없이 계몽하려고만 했다"며 자신의 20대를 눈물로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었습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겨우 인터뷰에 응한 그는 "지난 시절의 무용담은 늘어놓고 싶지 않다"며 미리 선부터 그었습니다. 일단 근황부터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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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수금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숲에 가서 건강달리기 모임에 참석해요. 주로 성동구 아줌마들이 모여서 아무런 연고 없이, 회비도 없이, 하다못해 회원 명단도 없이 그저 함께 걷는 모임이에요. 만나서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지만 사실은 서로 연락처도 모르는 탈근대적인 모임이죠(웃음). 처음에 '무슨 아파트 사는 누구 엄마예요'라고 제 소개를 하니, '우리는 누구 엄마라고 안 하고 이름을 말하는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운동 끝나면 함께 김밥도 먹고 회식도 하고 응봉산으로 개나리 구경도 가면서 진짜 힐링이 돼요. '학부형 모임에서 상처받았다'고 일단 운만 떼면 앞뒤 맥락 없이도 아줌마 특유의 통찰력 있는 조언, 격려, 위로를 주시는데 그게 아주 적확하거든요."

점거농성…장학퀴즈…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주립대 교수 신분을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나요?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미국 살다가 11년 만에 왔다고 소개는 했지만, 그걸로 끝!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더 묻지도 않아요."
-아줌마들끼리 모이면 가십이 많지 않나요?
"그게 아줌마 모임이나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저는 신입이라 주로 듣기만 하는데, 오늘이 6자회담 한·중 대표 만나는 날이라든지, 오세훈이 한양대 특임교수로 왔다든지 하는 시사적인 얘기는 다 그분들에게 들었어요."
-학교는 휴직하신 상태죠?
"미국 생활이 재미없고 몸도 안 좋아서 작년에 재임용 통과하고 병가를 냈어요. 올해 7월에는 돌아가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사직 의사를 표명한 상태예요."
-교수를 그만두신다고요? 왜죠?
"원래부터 교수가 되고 싶어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어요. 말하자면 긴데…. 99년에 386세대가 뭉쳐서 뭘 해보자고 시도하는 모임(제3의 힘)에 참여했어요. 방송작가로 일하며 꼴딱 밤을 새우고 나서도 새벽이면 모임에 가서 회의를 준비할 만큼 열심히 했어요. 결과는 참패였죠. 이번 대선 때 사람들이 겪은 것 이상의 상실감을 저는 이미 그때 경험했어요.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제가 끌어들인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산속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갔어요. 대학원 원서에 왜 공부하고자 하는지를 써야 하는데 정말 한 페이지도 못 쓰겠더군요. 뭘 쓰려고만 하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제게 영작을 가르치던 분이 일단 말로 해보라고 하기에, 제가 한참 망설이다가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빈손으로는 갈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안됐다면 왜 안 됐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해결 못 하고 미국에 왔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뭔가 들고 가야 한다'고 콩글리시로 말했어요. 반전 세대에 속한 선생님이었는데 제 얘기를 알아듣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더라고요. 박사를 따고 2009년에 교수가 됐지만 늘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느꼈어요. 점점 그 생각이 강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죠. 몸도 여기저기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한국에 자리 잡으려는 사전 준비도 없이 그냥 돌아오신 건가요?
"뭔가를 하려고 노력은 하죠(웃음). 그러나 교수로 수평 이동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꿈꾸는 일을 이루기 위해 꼭 교수여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어떤 꿈인지를 묻자 '지식공유 운동'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시민들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질 좋은 자료들을 갖춘 인터넷 기반의 시민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과 소셜 벤처라는 두 흐름을 묶어내는 네트워크 코디네이터 노릇을 해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과거를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 1985년 총여학생회장을 지낸 이진순은 같은 해 1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고 1991년까지 노동 현장에서 치열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문화방송 장학퀴즈 출제자로 방송 일을 시작한 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2000년 연말 문화방송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2009년 럿거스대학에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지금까지 미국 대학생들에게 시민저널리즘,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쳤습니다.

고2 때 진황운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유
-어려서는 어떤 아이였나요?
"부모님이 헤어진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엄마랑 살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고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확 조숙해진 것 같고요. 말없고, 소심하고, 겁 많고, 그런데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어요. '어른들이 나를 어린애로 대하니 그 기대에 맞게 어린애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일부러 생각했을 정도로요."
-얼짱으로 유명한 부잣집 딸인 줄 알았는데요.
"전혀. 초등학교 때 신문기사에서 우연히 '결손가정'이란 표현을 읽고,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느꼈어요. 동정의 눈길을 받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조숙하고 병적이고 친구도 없었죠."
-그런데도 공부는 잘했군요.
"부침이 심했는데, 고2 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잘하게 됐어요. 진황운 선생님이라고 제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첫 번째 친구였죠.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희 반 60명이 모두 안 친한 척하면서 선생님과 개별적인 대화 통로를 가지고 있었어요(웃음). 공부하라고 들볶지 않으셨지만 뭐든지 우리 반이 1등을 했죠. 공부를 잘하면 책을 사주셨는데, 10명이면 10명 각자의 특성에 맞춰 꼭 필요한 책을 골라주셨어요. 제 가정통신문에 '바람이 분다 해도 깊은 바닷물 속의 물고기는 즐거이 유영할 수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학생에게'라고 적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만나 뵌 지 오래됐는데, 기사에 선생님 성함을 꼭 적어주세요(웃음)."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시절은 어땠나요?
"직장은 힘들면 사표 내고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총여학생회장은 감옥 가는 순서 대기표와 같아서 사표를 낼 수가 없었어요. 운동권 내부의 비밀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합리성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학생운동 시절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가 잘못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나죠. 예를 들면 지금 사는 성수동은 제가 야학 했던 동네예요. 야학에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교회 같은 데서 하는 검정고시 야학과 우리가 하던 노동 야학. 노동자들은 주로 검정고시를 위해 야학에 왔어요. 그런데 거기다 대고 검정고시 꼭 봐야 하냐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죠. 그때 그냥 검정고시나 제대로 가르칠걸 하는 후회가 돼요. 흔히 386들은 자기 잘못한 거는 말 안 하고 고생한 무용담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옛날에 뭐 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그래도 저는 우리 세대의 정통성이 1980년대 고시, 유학, 취업 준비한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도 이제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사는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좋겠어요."

나에게 힐링을 주는 건 동네 아줌마들
-'제3의 힘' 또는 386세대가 정치 분야에서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룸살롱에 왜 갔냐 같은 건 화두가 아니고요. 기성정당의 논리와 자기를 구별하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5·18을 맞아 광주에 내려갔으면 선배 정치인이 끌고 간다고 해도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치기라도 보였어야죠. 재수 없어 터진 사건이 아니에요.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세대 중장년층, 60~70년대에 태어난 박정희의 아들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취지향성의 문제예요.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해. 일정한 직급에 올라가면, 그때 가서 우리 회사를 이렇게 바꿀 거야' 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변하는 건 생각하지 못한 거죠. 제가 요즘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정말 도와줄 줄 알았던 선배 중에 '네가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어디 얼굴이라도 나오지'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기존 문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두들 상상력을 잃어버렸어요. 끊임없이 자기 상상력을 반납하면서 기존 페이스를 따라간 거죠."
-고지부터 점령하라는 '고지론'의 노예가 된 셈이네요.
"그래서인지 옛날 똑똑하고 명민했던 선후배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면 다들 너무 삶에 지치고 부대끼고 닳아서 멍해져 있어요. 저 혼자만 10년간 어디 피난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예요. 그런 와중에 저에게 힐링을 주는 게 동네 아줌마들이죠."
언젠가 미국 출장길에 며칠 그의 집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밤새 함께 떠들고 아쉽게 헤어지는 기차역에서 그는 제 손에 작은 봉지를 쥐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가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그가 친누나처럼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봉지가 남긴 묘한 한국적 정서에 울컥하면서 '이분은 결국 돌아오겠구나' 확신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귀국한 그의 손에는 과연 한국 사회를 위한 어떤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저의 마지막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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