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 불리는 사슴에 대하여
윤 지 관 (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제 736 호>
한 해가 저물고 새해의 태양이 떠오를 차비를 하는 시기에 뜬금없이 사슴 이야기라니! 내년이 사슴처럼 순한 이미지를 가진 양의 해이기는 하지만, 사슴띠라는 것이 있을 리도 없다. 물론 사슴은 ‘십장생’ 가운데 하나고 정조가 신하들에게 새해선물로 십장생도를 하사한 기록도 있다 하니, 이런 역사까지 동원하면 아주 엉뚱하달 수 없을지는 모르겠다.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현대판 조고의 득세
하지만 사슴이 연말에 돌연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은 현실정치와 관련해서다. 일전에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회상을 정의하는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하여 한동안 죄 없는 짐승인 사슴(鹿)과 말(馬)이 말밥에 오르내렸다. 교수들의 중론이 이 용어로 모인 것은, 진나라 때 환관 출신의 권력자 조고가 반대편을 가려내려는 간계로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우긴 고사가 현재의 정치상황과도 흡사한 때문이다. 십상시(十常侍)니 하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권력자 측근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세론도 그렇고, 자명한 진실을 호도하고 오히려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재갈물리는 현실도 그렇다.
사실 이 사자성어는 진작부터 국정원의 대선개입 재판에서 “정치개입이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라는 대법원의 괴상한 판결을 보고, 한 현직 부장판사가 ‘지록위마의 판결’이라고 비판한 데서부터 주목받았다. 어찌 대선개입 문제뿐이겠는가? 그 국정원이 위조문서로 간첩조작을 하고도 멀쩡하게 건재하고, 국민의 과반수가 믿지 않는 천안함의 침몰원인을 정부와 달리 보는 과학자들을 종북으로 몰아붙이고, 세월호 참극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유족의 당연한 요구조차 쉽게 수용되지 않는 데다, 청와대 안팎의 현존하는 권력다툼을 문서유출 문제로 변조하는 최근의 행태까지,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현대판 조고의 득세는 이 시대가 정녕 당시와 같은 ‘말세’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이쯤 되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으로 알려진 사슴의 진짜 슬픔은 신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간신배들이 발호하는 이 시대의 어둠 탓인 듯 보인다. ‘무척 높은 족속’이었던 사슴이 만약 신문을 읽을 줄 안다면 자신을 막무가내 말이라고 우김에도 거기에 동조하는 자나 언론매체는 떵떵거리고 사슴이라고 제대로 호칭하는 측은 밀려나고 억압받는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될 터이다.
“사슴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켜거늘 듣노라”
그러니 이런 생각도 한다. 고려속요 [청산별곡]에 사슴이 등장하는 유명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 구절은 이렇다.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켜거늘 듣노라.” 여기서 ‘짐대’란 ‘당간’ 즉, 사찰의 불사를 알리는 깃발을 꽂아두는 깃대를 뜻한다. 사슴이 이 깃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켠다니, 국문학자들이 이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두고 해석이 구구한 것도 이해가 간다. 사슴이 진짜 사슴이 아니라 사슴 탈을 쓴 광대라는 해석도 그래서 나온다.
그러나 필자는 이 구절의 의외성으로 미루어 이것을 일종의 상징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는 편인데, 실상 사슴의 이 일견 괴이하게 보이는 행동은 정작 사슴보다는 그런 장면을 그려낸 화자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 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 법하다.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이 속요가 무신정권이 지속되던 고려시대 중엽 고향을 잃은 유민(流民)들의 한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 던진 돌인지, 누구를 맞추려던 돌인지’도 모르는 돌에 맞아 울고 있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라면, 짐대 위에 올라 해금을 켜는 사슴의 모습은 그 위험한 세상에서 이들이 꿈꾸는 판타지이자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아닐까?
사슴 이야기가 자꾸 가지를 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얼핏 떠오르기로는 뮤지컬로도 영화로도 유명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다. 이 작품은 혁명전야의 러시아에서 짜르의 폭압 아래 마을이 해체당하고 떠돌게 되는 유태인들이 힘겹게 일구어나가는 강퍅한 삶을 가파른 지붕 위에서 위태롭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에 비유한다. 억울하게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철탑에 오르는 일이 속출하는 시대다. 짐대에 올라가 해금을 켜는 오늘의 사슴들! 누가 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가?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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