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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파이의 '전설' 마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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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5. 11. 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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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여성 스파이의 '전설' 마타하리


연합뉴스  2015/11/26

 


사형대에 오른 '여명의 눈동자'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1015일 오전 7시께 프랑스 수도 파리 외곽 뱅센의 군 사격장. 어렴풋이 밝아오는 여명을 뒤로하고 한 여성이 처형대에 섰다. 41세의 이 사형수는 한사코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했다. 10월의 아침, 서서히 밝아오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지막 희망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요란한 총성과 동시에 전쟁에 휩싸인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은 사라졌다. 흑발에 갈색 눈, 올리브 피부를 가진 이 사형수는 본명(마가레타 게르트루데 젤레)보다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을 지닌 예명 마타하리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를 둘러싼 평가는 다양하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십 편의 영화와 그보다 훨씬 많은 단행권이 나왔다. 그의 명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하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위대한 스파이도 아니었다. 신비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특정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조작된' 공작의 희생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이 다 되어가지만, 명성이 퇴색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은 '마타하리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그의 신화가 조작과 배신이 판치는 첩보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성장기

마타하리의 출생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네덜란드인 탐험가와 인도네시아 자바섬 사원의 아름다운 댄서 사이에 출생해 어머니로부터 남성을 홀리는 뇌쇄적인 춤을 전수했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실상 그는 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1876년 태어났다. 네덜란드 서북부 레바르덴에서 성공한 투자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난 그는 13살 때까지 수녀원 부속학교에 다녔다.

학교생활은 엄격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 생활은 어려웠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대부인 사람 집에서 생활하면서 유치원 교사의 꿈을 키워온 그는 학교 교장의 성희롱을 견디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18살 되던 때 탈출구가 발견됐다. 우연히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군 대위로 근무하던 맥레오드라는 사람이 아내감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게 됐다. 맥레오드는 그보다 20살 연상이었지만,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상황에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동인도제도의 자바섬으로 간 그는 곧 절망에 빠졌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인데다 승진에 연거푸 누락된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내에게 퍼부었다. 폭행과 외박을 밥 먹듯이 했다. 불행한 생활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딸과 아들이 태어났다엉망진창인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가자 돌파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돌파구는 뜻밖에 가까이 있었다. 자바섬 전통 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전통춤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그에게 붙여진 마타하리라는 예명이 붙여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문란한 성생활로 성병에 걸린 남편 때문에 아들을 잃은 것을 계기로 마타하리는 귀국과 함께 이혼을 결행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파리행

이혼 직후인 1903년 마타하리는 프랑스로 향했다.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그는 처음에는 서커스단 일원으로 일하다 다시 화가의 모델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2년 후인 그는 서구인들에게는 낯선 이색적인 댄서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다. 아시아권 음악 전문 공연장(뮤제 기메)에서 첫 공연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파리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물랭루주' 극장을 주무대로 이국적인 무용 공연을 이어갔다.

마타하리의 공연을 알리는 선전문은 과장된 내용이 가득했다. 자바의 사원에서 춤을 추던 고혹적인 무희가 파리로 무대를 옮겨 은밀하고 에로틱한 춤을 선보인다는 내용의 이 선전문은 뭔가 이색적인 것을 갈구하던 파리 관객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분위기를 자극하듯 마타하리는 일곱 겹의 옷을 천천히 하나씩 벗으면서 결국에는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도발적인 춤을 선보였다. 무대 배경도 늘 힌두교의 시바 나다라야 신의 조각 장식이었다. 그 신은 파괴의 신이자 춤의 신이며 동시에 결실의 신을 뜻하기도 했다.

자바 춤과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인도 춤을 차례로 선보인 마타하리의 춤은 짧은 시간에 파리를 사로잡았다. 파리에서의 흥행 성공으로 마타하리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전 유럽을 무대로 한 공연 기회를 자연스럽게 얻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층, 정치인, 고위 장교 등 고급 관객들이 그의 춤에 넋을 잃어갔다. 오지에서 휴가를 나온 고위 장교들에게 마타하리는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본능을 느끼게 해주는 구원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기는 마타하리의 몸값을 치솟게 했다. 유럽을 돌면서 그는 명성과 권력에다 부까지 갖춘 유명인사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사이가 됐다.고급 매춘부가 된 셈이었다. 당연히 염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그를 유럽 정보기관들이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정보기관들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그에게 포섭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풍부한 자금력과 치밀한 공작원 교육 등의 명성을 지닌 독일군 정보부였다.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4개월 뒤인 191411월이었다.

 

본격적인 스파이 교육

포섭자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폰 미르바하 남작이었다.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의 뇌쇄적인 춤에 매료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마타하리와의 만남 직후 스파이로서의 자질을 발견했다.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를 군 정보부에 천거했다. 정보부 최고 간부진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마타하리를 독일에서 직접 면담하겠다며 미르바하 남작에게 독일로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이런 지시에 미르바하 남작은 한사코 반대했다. 전쟁이 발발한 와중에 이미 유명인사가 된 마타하리를 독일로 데려오면 신원이 쉽게 노출될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상대편 정보기관들의 이목을 끌어 위험성이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정보부 간부진도 완강했다. 결국,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에게 독일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에 따라 마타하리는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독일 국경을 넘었다.


◀ 그레다 가르보가 전설의 여자 스파이 마타하리로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군 정보부는 그를 중서부 프랑크푸르트로 보냈다. 그곳에는 스파이로 선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비밀리에 가르치는 '밀봉교육장'이 있었다.

공작관은 서부지역 정보 담당자인 폰 뢰벨 소령이었다. 그는 임무와 관련한 정치적. 군사적 소양을 가르쳤다. 정작 활동에 직결되는 정보 수집과 보고 방법 등의 교육은 엘스벨트 슈레그뮐러 박사가 담당했다.

마타하리는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특수 잉크를 사용법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폰 뢰벨 소령은 훗날 마타하리가 관찰력이 뛰어나고 정보 보고 역시 정확한 편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슈레그뮐러 박사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예술가 성향이 다분할 뿐 스파이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교육을 마친 그에게 독일 정보부는 첫 임무를 부여했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고위 인사들을 유혹해 정보를 빼라는 임무였다. 이제 스파이로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암호명 'H21'

마타하리에게 독일군 정보부가 부여한 암호명은 'H21'이었다. 중립을 표방한 네덜란드 국적 덕택에 마타하리는 1차 세계대전 와중에서도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전쟁터를 피해 보통 스페인과 영국을 거쳐 프랑스나 네덜란드에 입국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적은 독일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와 영국 방첩 당국의 눈에 띄었다. 마타하리는 1916년 스페인에서 영국을 경유해 네덜란드로 향하다 영국 방첩 당국에 일시 체포됐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방첩 당국은 영국의 도움으로 독일군 정보부의 무전을 거의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 마타하리가 독일 정보부에 포섭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연루자들을 더 체포하려고 모른 척했다.

밀봉교육까지 받은 마타하리가 본격적으로 어떤 스파이 활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이견이 분분하다. 미모를 이용해 프랑스군 고위 장교 등 '정보가치'가 높은 인사들을 유혹해 빼낸 정보를 독일군 정보부에 전달했으며, 이것으로 전세를 독일 쪽에 유리하게 돌리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이 마타하리가 했다는 스파이 활동의 핵심이다.

이견에도 분명한 것은 독일군 정보부의 밀봉교육 과정을 거쳐 거액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과 '정보가치'가 높은 유력인사들과 숱하게 잠자리를 가졌다는 부분이다. 스파이 활동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프랑스 동부 소도시 비뗄 부분이다.

당시 그곳에는 프랑스 항공대의 상당 전력이 배치돼 있었다. 종군 간호사로 자원한 마타하리는 그곳에서 여러 조종사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스페인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위장한 군 정보부 요원이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도 어렴풋이 활동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1월 초 군 정보부 요원이 본부에 보낸 전문에서는 'H-21'이 상당히 유익한 정보활동을 했다는 보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전문 역시 프랑스 방첩 당국에 의해 해독됐다.

 

체포와 처형

마타하리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7213일 파리의 한 호텔에서 체포되면서 그의 운명도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문 과정에서 그는 독일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면서도, 오히려 프랑스를 위해 독일을 상대로 하는 이중간첩 활동을 제안하기도 했다곧이어 프랑스 언론은 "성을 무기로 한 세기의 여자 스파이 검거"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체포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파리에 주재하던 미국과 영국 등 외신 특파원들도 마타하리의 검거 내용을 부풀려 보도했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찍은 마타하리의 생전 모습<<위키피디아 제공>>

 

마타하리를 둘러싼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 가운데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던 프랑스 병력 수송선 14척이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격침된 것도 마타하리가 사전에 넘긴 정보 때문이라는 것도 포함됐다. 또 독일 황태자와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꼬리를 물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혐의로 추가돼 기소 내용에 포함됐다. 체포된 지 5개월 만에 그는 정식 기소돼 재판정에 섰다.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결과 적어도 5만 명이 그가 제공한 정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혐의가 인정돼 총살형 선고를 받았다.

마타하리의 체포와 처형에 대해 정보 전문가 어니스트 볼크먼은 "빈번하게 일어난 군내 폭동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프랑스는 전선에서 패배에 대한 구실을 찾으려고 간편한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타하리는 그런 점에서는 적격이었다. 이제 그는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묘사됐다. 미모로 프랑스 장교들을 치명적으로 유혹해 군사기밀을 모조리 빼돌려온 무시무시한 여인이 된 것"이라고 평했다.

한 마디로 국면 전환 카드의 희생양이라는 평가였다. 이런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국 정보 당국도 지난 1999년 비밀해제한 1차 세계대전 관련 문건을 통해 마타하리가 독일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마타하리는 법정에서 스파이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성매매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절대로 반역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를 하루빨리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알몸으로 춤을 추다 첩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실수'를 저지른 마타하리는 정작 죽어서 명성을 구가했다. 음모와 배신과 위험이 가득찬 첩보세계를 그만큼 영화처럼 만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참고문헌>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Gordon Corera, The Art of Betryal: Life and Death in the British Secret Service(2012) *Jeffrey T. Richelson, A Century of Spies: Intelligence in the Twentieth Century(1995) *손관성, 우리는 그들을 스파이라 부른다(1999)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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