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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정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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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4. 9. 10.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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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시인 미발표 시 13편 무더기 발견

 

한겨레 2014-09-10

 

해방 공간인 1946~49년 쓴 작품들

첨예한 현실 인식과 진보적 역사관 담아

‘전원 시인’으로 불려온’ 신석정의 ‘재발견’

 

 

신석정(1907~1974·사진) 시인의 미발표 시 13편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해방 공간인 1946~1949년에 쓰인 이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첨예한 관심과 진보적 역사 인식을 담고 있어 그동안 ‘순수’ ‘전원’ 등의 수식어에 갇혀 있던 신석정 문학 세계에 대한 평가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신석정의 제자인 허소라 시인(군산대 명예교수)은 지난 3일 전북 전주 자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신석정 사후 간직해온 석정의 미발표 시 원고를 공개했다. 그가 공개한 석정의 미발표 시는 후반부가 멸실된 한 작품을 포함해 모두 13편. 이 작품들은 표지와 본문 상당 부분이 뜯겨 나간 누군가의 시집 여백에 적혀 있었고 대부분 말미에 탈고 날짜가 밝혀져 있었다. 여기에는 미발표작뿐만 아니라 <꽃덤풀> <봉화> <삼대> <비의 서정시> 등 석정 자신이 당시 잡지에 발표했던 작품 14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적혀 있다.

 

미발표 시들 가운데에는 “인민의 나라 세우는 날 새 나라 세우는 날”(<피-에레나에게 주는 시>)이라든가 “시방 우리 위대한 영웅 인민들은/ 부두에서/ 공장에서/ 모정에서/ 처참한 네 최후에 보내줄 만가를/ 부르고 있다”(<부활한 예수의 노래-이리떼에게 보내는 만가>), “해방의 노래랑 적기가랑 인민항쟁가랑/ 부르는 소리”(<고향에 부치는 노래>) 같은 구절들이 포함돼 있어 해방 공간의 격동기를 산 지식인이자 문학가로서 고뇌와 모색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1948년 6월30일 밤에 탈고한 <젊은 군상>이라는 작품은 유진오와 유정의 감옥행과 오장환이 당한 테러, 임화의 월북,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연명해야 했던 김기림 등 동료 문인들의 동향을 열거한 다음 “우리는 원광(圓光)으로 받들고 서슴없이/ 나가는 길에 서 있노라/ 새로운 조국으로 통하는 가까운 길이여/ 더 기쁘고나”라는 씩씩한 다짐으로 마무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허소라 시인은 “석정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친일 시를 쓰거나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며 꼿꼿이 버틴 문인이었다”며 “해방 공간에 쓰신 작품들에서도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정확하면서도 적극적인 인식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석정, 남의 시집 귀퉁이에 몰래 쓴 시… 그는 인민의 나라를 염원했다

 


▷ 허소라 시인이 3일 오후 전북 전주시 자택에서 새로 발굴된 석정의 미발표 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석정 미발표 시 13편 발굴
신석정의 미발표 시가 무더기로 확인된 것은 작자 미상의 파손된 시집 여백에서였다. 표지와 본문 상당수가 뜯겨 나간 이 시집 본문 18쪽부터 62쪽 사이 하단 여백에 석정이 손수 쓴 시 27편이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 14편은 석정이 직접 발표했거나 석정 사후에 제자인 허소라 시인이 공개한 작품들이고 나머지 13편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중 상당수 시에 ‘인민’ ‘해방’ ‘원수’ ‘봉화’ 같은 낱말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석정은 혼란스러운 해방 공간에서 이 작품들을 발표할 경우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스스로도 곤경을 겪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저는 석정 선생님이 이 작품들을 ‘암장’(暗葬)하신 거라고 봅니다. 표지도 없이 심하게 파손된 시집 여백에 낙서처럼 작품을 써 놓으신 건 혹시 가택 수색이라도 당할 경우 들키지 않기 위한 선생님 나름의 고육책이었던 것이죠.”

 

허소라 시인이 이 원고를 발견한 것은 1974년 7월 석정의 장례식이 끝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허 시인은 석정이 작고하기 직전 김기림의 서명이 담긴 시집 <기상도>와 <태양의 풍속> 등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줄 정도로 아끼고 신뢰했던 제자. 그는 유족들과 함께 스승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 시집 여백에서 선생의 글씨체를 발견하고는 따로 챙겨 두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여백에 쓰인 것들은 다름 아니라 미발표작들을 포함하는 석정의 시들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1970년대나 그 뒤 1980년대까지는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아껴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 자유도 어느 정도 신장되고 해서 지금쯤은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고 허 시인은 밝혔다.

 

◁ 파손된 누군가의 시집 여백에 쓴 신석정의 시 <젊은 군상>.


  해방 이듬해 1946년작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 담고
  분단 위기 놓인 1948년작엔
  ‘봄이 떠나간다’며 안타까움 노래

  기존 ‘목가시인’ 평가 뒤집는
  시인의 고뇌와 역사 인식 선연
  1946년 투옥 사실도 처음 밝혀져

  40년만에 공개한 제자 허소라 시인
  “시대상황 탓에 ‘암장’ 됐던 시…
  이젠 공개해도 괜찮겠다 판단”


 
“연약한 너의 아버지 이 감방에서/ 산송장으로 하고 있을지라도/ 인민의 나라 세우는 날 새나라 세우는 날/ 이 작은 피는 온몸으로 흘리리라/ 비처럼 사뭇 줄줄 흘리리라(1946년 5월6일)”(<피-에레나에게 주는 시> 뒷부분)

 

“‘영’이도/ ‘영’이의 동무도/ 젊은 놈이라고 생긴 젊은 놈은/ 모두 숨어버리고// (…) // 오늘밤에도 그 젊은 놈들은/ 어느 산마루에 봉화를/ 올리는 것일까?// 우루루/ 우루루루/ 아득하니 들려오는 우뢰ㅅ소리를/ 마을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영’/ 이놈들의 고함소리로만/ 들었다.(1948. 9. 1.)”(<원뢰(遠雷)> 부분)

 

“건넌마을 ‘영’이네 아버지가 떠나자/ ‘순이’의 오빠가 뒤이여 자쵤 감추고/ 동네 젊은 사람들은 시나브로/ 뉘 원수를 갚아야 하기에/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일까.(1949. 1. 8. 밤)”(<지리산> 부분)

 

인용한 시 <피>와 ‘감방에서 어린이날을 맞이하며’라는 문구가 덧붙여진 <오월이 올 때마다>(1946년 5월5일 탈고)는 석정이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46년에 석정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껏 알려진 바 없어서 이 시들은 시인의 전기적 자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원뢰>와 <지리산>은 문맥상 6·25 전쟁 전에 지리산 등으로 들어갔던 ‘구빨치산’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읽힌다.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품들에서 시인의 태도가 그들의 ‘고함’과 ‘원수 갚음’에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

 

“북극성이 똑바로 바라뵈이는” “준령”을 넘어 “촉나라로 가는” 두 청년을 통해 ‘월북’ 행로를 그린 듯한 <노숙>(탈고 시점 불명확)이라든가 “남녘 하늘엔 해도 없는가/ 밤에는 별도 별도 우는데/ ‘설마 오는 봄에사’ 하고 이르는 새에/ 이 봄도 가나베 떠나가나베”라며 해방의 감격이 또 다른 질곡으로 이어지려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담은 <이 봄도 가나베 떠나가나베>(1948년 4월27일) 같은 작품에서도 시인의 고뇌와 준열한 역사 인식은 선연하다.

 

허소라 시인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같은 초기 시를 근거로 석정 선생님을 ‘목가시인’의 범주에 가두어 두는 비평적 태도가 온당하지 않음을 이번 미발표 시들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며 “당신의 미발표작들이 <한겨레>를 통해 빛을 보게 된 데 대해 선생님도 흐뭇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신석정에게 ‘목가 시인’은 가시면류관이었다” 

한겨레 2014-08-24 

 
 
‘신석정 문학상’ 제정 계기 재조명
“자연과 역사 함께 아우른 시세계
문학사적 축소 왜곡 바로잡아야”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와 같은 목가적 서정시로 잘 알려진 신석정(1907~1974·사진). 타계 40주년을 맞아 지난달 ㈔신석정기념사업회가 출범한 데 이어 신석정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그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7월11일 출범한 신석정기념사업회(이사장 윤석정)는 중진 및 원로에게 시상하는 신석정문학상과 신진을 대상으로 하는 신석정 ‘촛불’ 문학상 두 부문으로 이루어진 신석정문학상을 제정해 10월25일 열리는 석정문학제에서 시상하기로 했다. 기념사업회는 석정의 제자인 허소라 시인(군산대 명예교수)을 위원장으로 삼은 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작품 공모 및 심사위원회 구성 작업에 들어갔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첫 두 연)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앞부분)

 

전북 부안 출신인 신석정은 1931년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내며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신석정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편석촌 김기림이 1933년의 시단을 회고하면서 쓴 글을 통해 방향이 잡혔다.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시인 신석정을 잊을 수는 없다. (…) 그의 목가 그 자체가 견지에 따라서는 훌륭하게 현대문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편석촌이 처음 쓴 ‘목가시인’이라는 말은 이후 신석정의 문학세계를 가리키는 단골 표현처럼 동원되었다. 삼림대, 호수, 물새, 장미, 노루, 해, 하늘 같은 자연의 물상들과 그가 시의 청자(聽者)로 자주 동원하는 ‘어머니’는 문명의 질주 속에 잃어버린 자연과 순수 원형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의 표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규정과 평가가 신석정 시세계의 폭을 좁히고 더 나아가 왜곡시킨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정양 시인은 1990년대 초에 발표한 평론 ‘목가적 음모-신석정의 <촛불>’에서 “목가적 성실성은 역사에 대한 성실성을 완성시키기 위한 예비적 음모였다”며 “소시민적 삶의 참담한 불을 켤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다’라고 버텨 보던 석정의 시는 비장하고 처절한 역사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정양 시인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도 “석정에게 ‘목가시인’이라는 규정은 가시면류관 같은 것이었다”며 “기념사업회 출범과 문학상 제정을 계기로 석정에 관한 문학사적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허소라 시인도 “석정 선생은 ‘서울공화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면서, 친일 시를 쓰거나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지조 높은 시인이었다”며 “자연을 노래하되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은, 자연과 역사를 아우르는 시 세계를 펼쳐 보인 선생의 시 세계를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데에 문학상이 큰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석정이 1939년 <문장>에 발표한 시 <들길에 서서>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정신 세계를 함께 담은, 그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다.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우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들길에 서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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