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샘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하였다고 하며,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불리워지고 수 백년 동안 생활용수로 공급되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아 2011년 지하수를 연결하여 원당샘이 마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복원하였으며, 북한산둘레길과 인접되어 있어 주민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써 원당샘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게되어 연산군묘 및 은행나무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봉구의 문화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放學洞 銀杏나무)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1호(1968.2.26.) 및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2013.3.28.)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24m, 둘레는 9.6m, 수령은 600년으로 서울특별시에서 최고령 그룹에 속하는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묘
조선시대 제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로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있다. 연산군은 성종 7년(1476)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1494년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심으로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직을 박탈당하고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죽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정덕8년(1513) 옮기에 되었고, 부인 신씨의 묘,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이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다. 연산군은 비록 왕을 지냈으나 그 지위가 군으로 강봉되었기에 무덤을 묘라 하였다.
위쪽에서 내려다 본 모습. 오른쪽 묘가 연산군묘
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모습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한글창제의 숨은 꽃, 세종의 딸 정의공주와 부마인 양효공 안맹담 부부의 묘소이다.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는 평소 한글창제에 관심이 많아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세종이 훈민정음을 거의 완성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해 여러 대군에게 풀도록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지만 정의공주가 그 문제를 풀어냈다고 전해진다. 안맹담은 14살 때인 1428년 정의공주와 혼인하였다. 평소 초서와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였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약물을 갖춰놓고 남에게 봉사하였고 佛法을 좋아했다고 한다. 신도비의 비문은 정인지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빈세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