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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문학관

한라의메아리-----/오늘나의하루

by 자청비 2016. 6. 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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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기념관을 나온 뒤 김수영문학관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려고 했는데 빈 택시가 보이지 않아 조금씩 걸어가는 사이 어느새 절반 정도 이르자 문학관까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김수영 시비가 선정돼 있다. 김수영 시비는 1969년 김수영 사망 1주기에 그를 기념해 문화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도봉산 입구에 건립한 것이다. 김수영 시비까지는 가지못하고 비교적 수월하게 김수영 문학관을 찾았다. 

거짓을 배격하고 구속과 억압을 거부한 시인. 자유와 사랑을 노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김수영. 그는 1921년 서울 종로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병약했던 어린시절을 겪고 난 뒤 그의 삶 자체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6.25 때는 북한에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오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인민군 출신이라고 붙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나온 그에게 서울은 서러운 곳이었다. 물질적 궁핍과 문화적 후진성, 독재정치와 분단 현실 그리고 서양 문물의 파도는 김수영에게 깊은 번민을 주었으나 김수영은 꿈과 감정을 다루는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충격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시, 자유로운 시를 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60년 봄, 김수영의 시적 세계를 변화하게 만든 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이 그것이다. 통제와 억압의 시대, 자유를 갈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던 그때.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다고 했다. 4·19혁명 이후 김수영의 시는 현실에 대한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자유. 자유와 사랑이었다. 한편 4·19혁명을 통해 자유의 참뜻을 현실적으로 체득했던 그는 4·19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져 자기풍자와 현실비판의 시들을 절규처럼 썼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김수영 시에서 자유의 이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고 이로부터 그의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탄생한다. 1968년 의문의 버스사고로 그는 아까운 48년의 생을 마감했다. 현대 문명과 현실을 비판하던 서정적 모더니스트에서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던 참여시 작가로, 모질고 격한 비바람 같았던 우리 역사와 함께 서서 시대와 함께 변모하고 고뇌했던 시인 김수영.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삶과 현실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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