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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바람문학회 제8집 수록

한라의메아리-----/문예창작 모음

by 자청비 2019. 12. 1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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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 돌과바람문학회 제8집


제주어 詩





 


  멸 공  


아침 숲 속에서 새들이 정신없이 지저귀듯

멀리서 들리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스럽다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마이크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광장 한편에선 구국기도회가 한창이다

하얀 천막아래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스무 남은 명이 앉아있다

백수의 왕이 열변을 토하는 듯 까랑까랑한

목사의 연설이 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앞줄에 어르신은 늙은 공작이 홰에 앉아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듯 멍하니 앉아 있고

뒷줄에 어르신은 잘 익은 벼이삭처럼

머리를 숙인 채 명상을 즐긴다

햇살이 천막위로 한가득 부서진다

한바탕 설교가 끝나고 도시락을 나눠준다는 말에

비온 뒤 배추밭에 나타난 달팽이처럼

어르신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구불구불 줄을 만든다

어디선가 나타난 할머니가 종잇장을 내민다

손을 내젓자 할머니가 자신있게 말한다

멸공인디?”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역광장이다.




어떤 확률

 

소행성 2018PM2850년내 지구와 충돌한다

확률은 29억 분의 1,

로또 1등과 4등이 동시에 맞을 확률이다

 

그 정도면

외계인의 침공을 받아 지구인들이 굴복할,

핵전쟁으로 지구가 방사능에 뒤덮이고

사람들은 몇천미터 지하세계에서 살아갈,

지구가 멸망하고 새로운 종족이 역사를 시작할,

사람들이 빅데이터가 제시하는 대로 살아갈,

빙하기가 도래하고 매머드처럼 사람도 화석으로 남을

확률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주를 만들어낸 신들이 행성으로 공놀이하다가

실수로 서로 부딪치게 되는 세상은

불을 보고 덤벼드는 하루살이에게 닥칠 디스토피아

제우스, 옥황상제, 천지왕 중에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장미 A단지

 

장미 A단지 카열에는 그녀가 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제 겨우 세 번 찾아왔을 뿐입니다

 

소주 한 잔 권하면서 그녀가 마저 하지 못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오늘도 아무 말 못하고 내려갑니다.

 

가을 햇살에 이마엔 땀이 흘러내리는데

유독 입만 얼어붙은 듯 열리질 않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요

 

지금 그녀의 딸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장미 A단지로 육신을 옮겨야 했던

그 고단함을 누가 알아줄까요.

 

젊은 날이 화려함은 모두 사라지고

어느새 초라해진 내 모습으로 인해

고단했을 그녀가 더욱 생각납니다.

 

그녀의 집 앞에 놓인 조화가 불편해보입니다

그림자를 조용히 풀밭에 눕혀 놓고

파란 도화지에 그녀를 한 번 그려봅니다.

 

앞으로 다시 찾아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과연 무슨 말이 해야 할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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