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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바람 제10호

한라의메아리-----/문예창작 모음

by 자청비 2021. 8. 4.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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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기억

 

노르스름한 황사 속에

갇혀버린 한라산처럼

2평 남짓한 사무실에 갇혀

시들어가는 꿈

흐릿해진 산 그림자처럼

점점 희미해지는 젊은 날의 꿈

이젠 꿈을 꾸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도심 속 공원을 뒤덮은 송홧가루에

머리가 터질 듯하다

파친코와 미나리가 캡틴 에이를 앞세우고

날아간다, 덩달아

짧은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복어가

하늘을 향해 힘껏 몸을 내던졌다

 

시간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세월은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홑씨처럼 퍼져간다

말랑말랑해진 봄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혈관 따라 떠돌던 꽃씨가

어느새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유 령

 

희뿌연 미세먼지가 되어

도시를 휘감고 있다

널따란 크렘린 궁처럼

빌딩들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어제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다다른 말이

혓바닥을 넘지 못했다

내뱉고 나면 돌아올

고립이 두려운 것이다

길어지는 침묵의 시간

짧아지는 운명의 시간

코로나와 함께 하는

두 번째 봄, 소공원에선

예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꽃비가 되어 아직은 차디찬

바람과 함께 하염없이 내리다가

다시 황사와 송홧가루가 되어

그림자를 다독이고 있다

 

의 충성

 

군홧발 사라진 자리에

매뉴얼대로 생산된 엘리트들이

흙탕물을 한가득 뒤집어 쓰고 있다

특별한 서비스의 오르가즘과

달달한 맛 포기 못해

룸살롱에서 외쳤던 민주와 정의는

발렌타인 30년산에 녹아 증발되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만 오롯이 남아 있다

 

민주에 대한 신념과 질화로 같은

따스함은 퇴출의 대상

법전과 천칭 저울은

공평무사의 상징이 아니라

인터넷시대에 맞춘 고무줄 잣대

비아그라주 충성주 황제주와 함께

외쳐온 우리가 남이가라고

꾹꾹 눌러 휘갈겨놓은 찌라시가

회오리주에 실려 천장으로 날아간다

 

트럼프주의

 

인디언을 도륙하고 대륙을 훔친 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내린

권리와 의무이고 숙명이었다

신대륙을 찾아온 그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인종, 성별, 국적을 초월한 천명이었다

그들의 기독교는 천부적 권리의 근원,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았던

인종주의는 천부적 권리의 조건,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치는

국가주의는 천부적 권리의 현실이었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코비드를 타고

나타난 트럼프의 망령들에게

세계의 평화는

개척시대 무법자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위대한 미국의 재건이며,

인류 최고의 가치는

함께 하는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차별하고 억눌러 나만 향유하는 자유

 

퇴색된 천민자본주의를 여전히 갈망하는 자들

하얀 촛불에 권위와 특권을 잃은 자들이

화려했던 부조리와 이기심을 되찾으려

국익도 자존도 논리도 주저없이 내던진다

입에는 마구 뱉어낸

쓰레기가 한 봉지씩 매달려 있다

 

막 차

 

텅 빈 듯 엔진소리만 들려오는

마지막 노선버스

차 안엔 고등학생 같은 남학생과

대학생 같은 아가씨 서넛

저녁 반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초로의 남자

버스 안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차창엔 밤의 기운이 더욱 차가워져가고

버스는 깊어가는 밤 속으로 질주하며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달려가고 있는 건가요

 

한 때는 꿈을 싣고 달렸는데

오늘은 고단함을 싣고 간다

버스 좌석 사이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여기를 스쳐갔던 사람들이 내뱉은

마디마디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원시의 광막한 바다가 펼쳐진다

매서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철썩대는 한줄기 파도가 내 몸을 휘감는다

깜짝 놀라 고개 들어보면

한 밤의 가운데로 내달리는 버스 안

내려야 할 정류장도 지나친 채

한참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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