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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집 출품 4편

한라의메아리-----/문예창작 모음

by 자청비 2022. 9. 2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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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시인의 이야기

 

 

석양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 있던 것이

갑자기 꺼지면서 멀어져 가자

그는 스스로 소멸되고 있다고 느꼈다

여행에 나설 때면 언제나

죽음 가까이 자신을 몰아 넣었다

망자의 인도를 받고

망자를 만날 때도 거리낌이 없다

숨은 쉬고 있지만

내면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의 환영으로 가득 차 있다

망자들이 자신에게 넘겨준 것은

오로지 자신을 통해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골만 남아 있어도 다행인 공간이다

그에게 꿈이 다가오는 순간은

크레인에 매달린 쇠갈고리에

머리통이 깨지듯,

자동선반 기계에서

팔이 잘려나가듯 아찔한 순간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자는지, 꿈을 꾸는지도 모른 채

떠오르는 시상을 남기기 위해

글자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 간다

작품 제목은 죽음에 대한 사유思惟

 

 

 

 

붉은달

 

바닷가에서 달을 들이킨다. 거침없이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파도는 봄을 향해 물결치는데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추하고 타락한 욕망이

막무가내로 대지를 뒤덮는다

이제 따뜻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찬란한 허무만 남을 시간

 

취한 눈 비틀거리며

하늘을 향하면

붉어진 달이 입속으로

거대한 물줄기처럼 사정없이 퍼붓는다

하얀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 즈음

코로나검사 자가진단기에는

빨간줄 두 개가 그어진다

 

온종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며 생각한다

주저앉아버린 척추를 끌어안고

어둠의 숲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온종일 바닷가 모래더미 속에

파묻히는 꿈을 꾸며 생각한다

저 붉어진 달 속에서

신명나는 어릿광대를 만날 수 있을까

 

 
 

 

광기의 시대

 

 

다시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

칼든 자, 권력의 장단에 맞춰 칼춤을 추고

붓든 자, 형광등 수백개 밝힌 아우라를 찬양하고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시대

사람의 노동을 우습게 알고

중장비 기계로 밀어붙이는 그런 시대

어깨에 매달린 별의 무게 감당 안 돼

독수리 그림자 속에 숨는 그런 시대

 

촛불이 광화문에 모였던 이유

촛불이 서초동에 모였던 이유

그들은 평생 가도 모르겠지

불타는 수소 구름에 둘러싸여

뜨거운 얼음으로 이루어진

글리제 436b 행성에 가면

비로소 알게 될거나

텅 비어버린 가슴 속을

풀숲 사이에서 수줍게 고개 내민

봄 꽃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허위적 허위적 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느린 계면조 가락의 사랑 거즛말이

봄 들녘에 메아리친다

 

 

 

 

어두운 5

 

 

5월은

나비같이 아름답지만

달팽이처럼 침묵한 채 길을 가야 한다

5월이

땅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광기어린 무당이 날 선 작두를 타듯

이미 공중에서 헛발질은 시작되고 있었다

 

간웅도 못되는 한낱 도부수에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5월이 산산이 조각난다

나비가 고통을 이겨내고 우화의 기쁨도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팽이처럼 견뎌내야 한다

평온했던 수평선이 흔들리고

이제 또, 얼마나 끔찍한 유체이탈을 봐야 하나

 

그윽하던 향기 사라지고

온갖 악취 진동하는

판이하게 달라져버릴 세상에서

붉은 황사바람에 지평선이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것은

혁명을 일으켰다가 참수당하는 느낌

 

무지렁이는 아닐진대

겉보기에는 그럴 듯 해보이는데

한꺼풀만 들춰내면

그 속은 너무 어두워,

어둠조차 복면을 쓴 채

다시 짙은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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