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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꿈꾸는 달리기

한라의메아리-----/문예창작 모음

by 자청비 2025. 1. 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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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바람 12집>

 

율도국?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조선시대에 서자로 태어난 탓에 호부호형을 못하던 홍길동이 바다 건너 멀리 어느 섬에 가서 세운 나라다. 홍길동이 나라를 세운 것은 양반들의 학정을 피하고, 만백성이 평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법과 제도를 잘 정비하고, 나라 이름을 율도국이라 했다.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와 행정은 법과 제도에 따라 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이 없이 모든 법은 만백성에게 평등하게 적용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율도국이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면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율도국에 사는 Y라는 한 남자가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앞두고 이런저런 갈등하는 속내를 들여다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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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토요일 아침, 모처럼 10월 가을 날씨답게 화창하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주중에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 이어졌었다. 거실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파란 하늘과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다.

Y이제 좀 더 있으면 산 곳곳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올라오겠네라고 생각하며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런닝용 티셔츠와 토시, 반바지를 착용하고, 모자를 썼다. 햇빛방지용 안면 마스크를 목에 걸치고, 블루투스 이어폰도 귀에 걸었다. 운동용 장갑과 스마트 폰, 물병을 넣은 허리 가방도 다시 확인했다. 허리 가방을 손에 쥔 채 현관으로 향했다. Y는 현관 앞에서 앉아 운동화를 신고 신발 끈을 바짝 조였다. 처음으로 야외에서 장거리 달리기에 나서는 것이라 가슴이 설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운동화끈 매듭을 모두 정리하고 허리에 가방을 둘러매고, 한두 차례 제자리에서 툭툭 뛰어보았다. 아내가 안방 문을 열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왔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두어 달 전 Y퇴직기념으로 마라톤 대회에 나가야겠다고 하자, 아내는 미쳤냐고 하면서 지청구를 했다. Y가 끈질기게 설득하자, 결국 무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매듭지었던 터였다.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나선 후 빌라 입구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는데 같은 빌라에 사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반가운 얼굴로 말을 붙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침 운동 나가시는 거예요!

,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죠.”

Y는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트레칭을 마친 Y는 천천히 빌라 앞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매스컴에서는 율도국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섰고, 앞으로는 100세 시대이므로 이에 대한 대비를 잘해야 한다고 연일 떠들어댔다. 대학 시절 만나면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사회를 토론했던 벗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정년퇴임 이후 삶이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Y는 그럴 때마다 초조했다. 이재에 밝지 않았던 터라 돈을 모아두지도 못했고, 물려받을 재산도 전혀 없었다. Y는 다만 은퇴 후 그저 그런 책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될 만한 책을 써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50대 중반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서 국문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Y는 퇴임 이후 삶이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순진한 모습은 무지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착한 모습은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에서 독해져야 한다. 교언영색도 하고 권모술수도 쓸 줄 알아야 한다. 도둑질이나 잔인한 살인도 해야 하고, 악마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지난 8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낮 최고기온이 35도를 넘어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북극의 만년설도 녹아내리게 할 뜨거운 태양이 작열했다. Y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도로를 보면서, 저 도로 위를 무아지경으로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아라비아 사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긴 뫼르소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싶었다. Y는 우선 퇴직 기념으로 마라톤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11월 마지막 날에 예정돼 있었다. 불과 4개월 남짓 밖에 시간 여유가 없다. 그 기간에 풀코스인 42.195에 도전하기는 어렵고, 하프코스면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건강 삼아 오름 산행도 자주 하고, 운동도 조금씩 해왔기에 열심히 준비하면 될 것 같다고 여겼다.

그때부터 무더운 날씨를 피해 실내 체육관에서 트레드밀을 이용해 2시간 동안 달릴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두 달여 동안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꾸준히 체력훈련을 하다 보니 빠르지는 않지만 2시간 정도는 뛸 수 있게 됐다.

10월로 접어들자 Y는 야외에서 실전 달리기에 나서기로 했다. 트레드밀 달리기와 야외 달리기는 실제 사용하는 근육이 달라서 실전 훈련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Y는 오늘 첫 야외 실전 훈련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Y가 주택지를 빠져나가자 건물에 가려졌던 아침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Y는 한 손을 들어 햇살을 가렸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로 가장자리로 뛰어가던 Y가 갑자기 엉거주춤하며 발놀림이 흐트러졌다. 도로를 건너던 달팽이 한 마리를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Y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달팽이를 도로 옆에 있는 밭으로 옮겨 놓았다. ‘이제 시작인데, 살생할 수는 없는 일이지그리고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바다로 가야 할 달팽이인데 예서 죽는다면 안될 말이지

큰 도로로 나가기까지는 작은 골목길이 이어졌다. 미로처럼 꼬불꼬불 이어진 길이었다. Y에겐 익숙한 길이다. 오랫동안 아침 산책을 하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골목길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비포장 흙길이었던 것이 이제는 깔끔하게 포장돼 있다. 예전에는 고작해야 농사용 화물차량이 드문드문 다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승용차들이 수시로 지나갔다. 골목길에 인접한 농장에서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삼나무, 편백나무, 구럼비나무, 동백나무 등에 숨어 살던 새들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갑자기 소란스럽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차들이 많이 다니는 4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곧바로 오르막길과 마주했다, 오늘의 장거리 도로주행에 나타난 첫 오르막길이었다. Y는 힘차게 발걸음을 뻗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숨이 차 헉헉거렸다. <오르막길>이라는 노래를 떠올렸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 “.

Y가 오름 산행에 나설 때마다 즐겨 듣던 노래였다. Y는 오름에서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곤 하였다.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Y는 그때마다 <오르막길>을 새삼 읊조리고는 하였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삶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그 고생했던 만큼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설령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없더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까지 이 땅을 거쳐 갔던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4차선 도로에서 더 넓어진 6차선 도로로 이어졌다. 도심에서 외곽지역으로 이어지는 큰 도로다. 이 도로에는 휴일 아침인데도 많은 승용차와 노선버스가 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사용 덤프트럭과 중장비를 실은 트럭도 공사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듯 속도를 올리며 지나갔다.

Y는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를 차박차박 달렸다. 6차선 도로로 접어든 이후에는 비교적 평지가 계속 이어져 그런대로 숨차지 않고 편안하게 뛸 수 있었다. Y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놓인 마름모 형태의 빨간 보도블록이 두세 개씩 뒤로 스쳐 지나갔다.

얼마 후 Y6차선 도로에서 도심 우회도로로 접어들기 위해 다시 오르막길을 치고 올라갔다. 도심 우회도로는 왕복 4차선이긴 하지만 인도의 폭이 넓어 매우 넓게 보였다. 또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도로여서 차량이 많지 않아 도로가 더 넓게 보였다. 이 도로를 이용하면 도심 외곽으로 빠르게 나갈 수 있어 차를 타고 많이 이용했던 터라 주변 풍경이 낯설지는 않았다. 도심 우회도로여서 도로만 개설돼 있을 뿐 주변은 거의 자연 상태였다. 도로변 아래쪽에는 왕고들빼기, 달개비, 붉은서나물, 금잔화, 망초, 억새, , 질경이, 바랭이, 개망초, 민들레, 중대가리풀, 제비꽃, 방동사니, 괭이밥, 이질풀, 땅빈대, 명아주, 마디풀 등 온갖 풀들이 어우러져 계절에 맞춰 피어났다. 어지러이 피어나는 들풀들은 봄, 여름, 가을 계절마다 풀숲 사이로 조그만 꽃들을 살포시 드러내곤 하였다. 돌담 위로는 소나무와 구럼비나무, 참식나무, 다정큼나무, 돈나무, 산딸나무, 먼나무 등이 군데군데 보이고, 가지에는 갈퀴덩굴, 담쟁이덩굴, 환삼덩굴, 갈퀴덩굴, 등칡, 넝쿨 등 갖가지 덩굴식물들이 얼기설기 얽혀져 있다. 도로변 건너에는 구불구불한 돌담과 각종 농작물, 비닐하우스 등이 자리 잡아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전형적인 농촌 분위기를 보여줬다.

그러한 모습을 상상했던 Y는 오늘 달리면서 주변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던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 공장, 물류창고 등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대형 아파트단지와 고층건물들이 우뚝 솟아있고, 날씨가 좋아 파란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도로 주변 식생 상태도 종전의 자연 상태보다는 많이 정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산처럼 돼 있던 임야도 곳곳이 많이 개간돼 있었다. Y는 도심 구역이 머지않아 이곳까지 확대되겠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었다.

Y의 눈에 밭 주변에 다목적스포츠용(SUV) 차량 3대가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밭도 예전엔 풀과 잡목으로 우거진 임야였으나 말끔하게 밭갈이 돼 있고 돌담도 깨끗하게 쌓아져 있다. 한쪽 편엔 컨테이너 부스가 두 개 세워져 있고 그 옆에 파라솔을 얹어놓은 탁자 두 개가 연 이어져 있다. 몇몇 사람이 차와 컨테이너 부스 사이를 오가며 상자에 담긴 물건들을 나르고 있다. 아마 점심때 간단한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는 듯했다. 그런 모습이 Y는 부러웠다.

Y가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 계곡 바위를 감상하며 교량 위로 달려갈 때였다. 갑자기 타당하는 큰 소리와 함께 옆으로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Y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랐다. 교량과 도로 이음 부분에 깔린 이음쇠 때문에 나는 소리였다.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다 보니 덜컹거리는 소리가 깜짝 놀랄 만큼 크게 들렸다. Y바쁜 일이 있나 보네.’라며 이내 생각에 잠겨 들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요즘은 국내에 사는 외국인조차 내국인을 따라 해서 식당에 가면 빨리빨리라는 말을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던 적이 있다. 가난에 허덕이던 율도국이 불과 70여 년 만에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빨리빨리가 만들어낸 긍정적 효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혹은 잃어버린 지도 모른 채 지나가고 있다. 하루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속도를 줄일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덜컹거림에서 오는 차체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후유증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갈수록 문제를 드러내는 빈부격차, 세대갈등, 소수자 차별, 졸부들의 천민의식 등이다. 공동체 사회였던 우리 사회가 돈의 맛을 알고부터 나와 처지가 다른 타인에 대해 모질게 대하고, 배척하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러한 세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슬로우 라이프차별 없는 세상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세를 뒤집어 놓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흐름이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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