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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바람문학 9집 수록 시

한라의메아리-----/문예창작 모음

by 자청비 2020. 11. 3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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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2

 

강렬한 태양 속으로 검은 점 하나가 터진다

폭발음에 놀라 저절로 몸을 움찔한다

감염이 아니라 왜곡과 편견이 더 무서워진다.

 

백성을 숙주삼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운다

민중을 개, 돼지로 알고,

평소엔 목에 힘주고 다니다다 선거 때만

그동안 잘못했다며 믿어달라는 군상

 

허수아비 세워놓고 국익도, 국격도 내팽개치고

권력을 농락하고 의전놀이만 즐기던 군상

표창장 준 적 없다고만 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게

돈을 건네 줬다고만 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게

새로운 권력에 취한 검판새는 법을 희롱하고

법 앞에 평등도, 공정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월호 부모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단식투쟁현장에

과식 투쟁하는 군상

코로나 감염병으로 운영이 힘들어진 식당들을 위해

과식 투쟁하는 청춘

전자는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바이러스

후자는 미래를 향해 손 내미는 바이러스.

인간과 바이러스의 동거는 끝없이 이어진다

 

 

다시 시작해

 

화려한 네온에 감춰졌던 도심 뒷골목의

아침은 은밀하게 수음한 뒤 쪼그라든

허탈함처럼 축 처진채 널부러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고

그들 앞에서 억지로 재롱떨어야 했던

코끼리들은 밀림으로 돌아갔다

인적이 사라진 해안에는

멸종위기라던 바다거북이

번식을 하기 위해 나타났다

자동차가 사라진 도로에는

코요테, 퓨마, 산양들이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며 모처럼 자유를 만끽했다

 

하얀 갈매기 가슴털같은 구름 아래

유채꽃 물결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환상의 계곡에서 비밀의 문을 향해

달려가는 달팽이처럼

지치지 않고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일지라도

 

 

 

 

바람이 되고 싶어

    - 어떤 돼지의 꿈

 

내 이름은 새벽이다.

도살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될 운명

 

틈만 나면 부엌에서 먹을 것을 찾고

먹을 게 나올 때까지 포기할 줄 몰라

엄마의 사랑에 굶주린 나의 식탐이다

고구마와 찐 감자, 바나나를 좋아하고

감귤이나 오렌지같은 신 과일은 싫다

가장 신나는 건 코로 흙을 파낼 때이고

가장 짜증나는 건 불편한 옷을 입히려 할 때

그럴 때면 나는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내가 태어날 때 분만사는

온갖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없는 아주 비좁은

공간에서 누운 채 숨만 헐떡였다

다른 형제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할 운명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지금 나는 한낱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돼지의 삶을 산다. 이것은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준 구속된 자유

나는 밤마다 바람이 된다

 

 

 

자아분열

 

물 속에서 금방 나온 듯 온 몸이 땀으로 젖어갔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운듯 한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몰아치는 파도처럼

구역질이 밀려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발 끝에서부터 서서히 부서져 갔다.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터뜨리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점점 물들어가는 긴장과 공포

자욱한 안개속 바닷가에서

분주하게 오가던 사람들이 토악질하듯

뱉어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주로 변해

심장을 관통했다

피와 살이 사방으로 흩어져나가고

뼈들은 수천개의 파편이 되어 허공에 퍼졌다

그 모든 것을 사로잡는 광기에

존재감마저 회색빛 아스팔트 바닥에

파쇄기로 갈아낸 종잇장처럼 내팽겨쳐진다

이어진 침묵과 고요, 그리고 무()

조용한 외침 속에 윤슬만 넘실거리고

알 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침묵의 시간

 

검은 흙탕물이 도도히 흘러간다

열심히 살았던 삶의 궤적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온갖 쓰레기처럼 쌓여만 가는

도도한 말의 성찬

서로 질세라 온 힘을 다해

절제 없이 비난을 토해낸다

길가에 쏟아진 우유처럼

주워 담지도 못하고,

그럴 의향도 전혀 없어

주변을 거리낌 없이 어지럽히는

기괴스러움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위를 날아가는 나비처럼

아슬아슬하면서 날카롭게

폐부에 박혀간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과 정의의 편이 아니라

유리한 편에 서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

공정한 수사란

돈과 힘이 있거나 친한

사람의 부조리는 눈감아주고

진실과 정의를 기대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적어도 대한민국 사전에선

폐기물처리장에 보내져야 하는 것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전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당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한 순간의 감정은 올가미가 되어

목숨을 위협한다

지상에서 발원된 말은

땅 속으로만 흘러간다

모두가 소리치는 지금은

침묵해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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