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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으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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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5. 7. 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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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우리가 이 마음보만 고치면 정말 대단한 민족이 될 텐데 어찌하면 이 독심(毒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실, 시기심이란 자연스러운 감정이거니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시기심의 뿌리가 자기애(自己愛)란 점을 상기할 때,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향상에 대한 욕구도 없기 마련이다. 드물지만 아주 가끔 시기심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처럼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요순시절 백성 같은 그분들의 삶은 너무나 무미하다고 할까, 좀 재미가 적다. 적당한 시기심은 일단 확보한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우리를 채찍질하여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전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애에 기초한 시기심은 어쩌면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愛己愛他)”고 가르쳤던 도산(島山)의 말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자기애야말로, 적절하게 조절만 된다면, 타자애(他者愛)로, 나아가 우리에 대한 공동체적 사랑으로 고양될 바탕이 될 수도 있다.

                                   <시기심, 우리 사회 통합의 저해요인>
고민은, 대개의 경우, 시기심이 이런 긍정적 방향으로 잘 뻗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이 경향은 우심하다. 오죽하면 이런 야비한 속담이 횡행할까? 
남이 잘되는 일에 이처럼 배아파하는 심보는 우리 민족의 성격이 원체 악착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이 사회심리의 바탕에는 그 동안 우리 기득권층에 대한 민중적 비판이 깔려있다. 우리 사회의 가진 자와 있는 자들이 규칙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야말로 자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섰는데도 그랬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는 차치하고 해방 후만 따지더라도 그들의 부와 권력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요즘 몰아치는 삼순이증후군도 이런 비판의식과 무관하지 않을진대 먼저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뼈아픈 각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언제까지 기득권층 탓만 할 것인가? 어디선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남탓 하지 말고 우리가, 아니, 나부터 시기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민간독재, 군사독재, 유사군사독재를 골고루 거치면서 그 부정한 권력들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민주정부를 건설하기 위한 긴 싸움에서 시기심은 강력한 저항의 무기였다. 절차적 민주화가 일단락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이 전환기에 시기심의 어떤 공공성은 급속히 사적인 질투로 대체되었다. 평등주의의 확산 속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상태가 인터넷의 놀라운 보급과 함께 도래하였다. 통합이 아니라 배제의 원리로 작동하는 시기심의 부정적 양상이 대발하는 형국인 것이다. 
특히 그 폐해는 남의 장점을 긍정하고 그로부터 한수 배우려는 공부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데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면에서 강점을 보인다고 한다. 낯선 자가 나타나면 일단 대결하지만 패배할 경우 그에게 깨끗이 승복하고 그로부터 배울 바를 성심으로 학습하여 결국 그를 추월하는 게 일본인이란다. 이에 비하면 한국인은 승복에 인색하다. 실력은 신통치 않은데도 위에서 노는 자들에게까지 승복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히 한수 위인데도 낮은 시기심으로 승복하지 않는 것은 병통이다. 

                              <시기심에 대한 근본적 싸움에 함께 나설 때>
시기심은 아주 전염력이 강한 게 특징이다. 한 집단에 이런 자가 있으면 나머지도 알게 모르게 감염된다. 이 바이러스가 퍼지면 그 집단은 끝장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으니 사람이 클 수 없다. 사람이 가장 주요한 자산인 이 나라에서 선후배가 상호 섬기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편달할 때 나와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그때 비로소 후속세대의 창발적 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이, 시기심에 대한 근본적 싸움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계제가 아닌가 한다. 
나는 청소년축구대표 백지훈의 인터뷰기사에서 희망을 보았다. 온 나라가 박주영에 열광해도 그는 의연하다. 박주영만 각광을 받아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에 박주영이 잘하니까 그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며, 백지훈 자신도 이제는 더 잘해서 그처럼 되겠다고 환하게 웃는다. 얼마나 근사한가? 우리도 백지훈 선수를 따라, 남의 슬픈 일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남의 기쁜 일에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공부에 함께 나설 때다. 


글쓴이 / 최원식
· 인하대 문과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 서울대 국문학박사
· 민족문학사학회 공동대표
· 저서 : 한국의 민족문학론
           한국 근대소설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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