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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국어정책 유감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06. 2. 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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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국어원(http://www.korean.go.kr/)은 2005년 12월 28일 포르투갈, 네덜란드, 러시아어 등 세 언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지정, 고시했다. 그리고 지난 1월 5일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언론에 알리면서 "1986년에 제정한 현행 외래어표기법이 이들 언어에 대해 자세한 표기규칙을 두지 않아 현지 발음과 동떨어지거나 체계적이지 못해 언어생활에 혼란을 빚어왔다"며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새 표기법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히려 새 표기법 때문에 국민의 국어생활이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새 표기법에 따르면 그동안 온 국민이 '거스 히딩크'라 부르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은 '휘스 히딩크'로 바뀐다. 또 차이코프스키는 차이콥스키, 고골리는 고골,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롭스크, 흐르시쵸프는 흐르쇼프, 루빈스타인은 루빈시테인으로 써야 한다.
 그뿐 아니다. 무엇을 기본으로 만든 '관용 표기'인지 모르겠지만, '아드보카트의 아들 앗보카트가 한국에 왔다'거나 '하멜의 손자인 하멀은…' 따위로 써야 한단다.
 국립국어원은 이처럼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 일을 벌이면서 국민의 얘기는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공청회는 고사하고, 신문사에서 매일 외래어표기법과  씨름하는 교열기자들에게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수백억원의 국가예산을 들여 교과서를 다시 찍어야 하는 상황을 국립국어원은 아주 비밀스레 만들었다. 그 이유가 뭘까? 국립국어원의 한 관계자는 "표기법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데, 그 일을 하면서 일일이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무서운 말이다. 슬픈 얘기다. 그 관계자의 말이 국립국어원 전체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면 이미 우리의 국어는 죽은 송장이다.
 말과 글의 주인은 국민, 즉 언중이다. 일부 학자들이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 못된다. 한글맞춤법이 어찌되어 있든, 표준어규정이 어떻게 정하고 있든, 많은 언중이 자주 쓰면 그 말이 표준어가 되는게 상식이다.
 외래어도 마찬가지다. 미국인이 어떻게 소리내든, 아프리카 원주민이 뭐라 발음하든, 그런 말이 우리 국민이 똑같이 쓰는 말을 못 쓰게 만들 수는 없다. 세상에 '그런 벱'은 없다.
 국립국어원은 '나라의 적기가 외국의 말소리와 달라 어린 백성이 혼란을 겪는 것이 안쓰러워' 새 표기법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라디오' '컴퓨터' '밀크' 따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외국 어디도 우리를 대한민국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KOREA'라 쓰고 '코리아'라고 소리내는 영문도 지들 마음대로 'COREE'라고 적고 '꼬레'쯤으로 소리낸다.
 그것이 외래어 표기다. 외래어 표기는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당신네 말을 당신네 소리대로 잘 적어주고 있지요'라고 자랑하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국어생활에 통일을 기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번 정해진 것은 쉬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툭하면 바뀌는 외래어 표기는 정말 문제다.
 더욱이 이번 새 표기법은 국립국어원이 수년 전 1백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만든 <표준국어대사전>마저 쓰레기로 만들었다. 그 사전은 이제 버려야 한다. 아직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새 표기법과 다른 말이 수천자는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 표기법은 이미 지정, 고시됐다. 이제 와서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만든 표기법을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이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국립국어원이 몇몇 학자들 중심으로 표기법을 만들고 국민들은 무조건 따르라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국립국어원이 언중 위에 군림하면 국어가 죽는다.

 <기자협회보1/18일자 엄민용 스포츠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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