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지마라"

세상보기---------/현대사회 흐름

by 자청비 2007. 5. 5. 17:33

본문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지 말라”

우리는 왜 ‘한국인’에 집착하는가…해외동포·이주노동자 등 15명이 쏟아낸 사연들

 

“그는 한국인이었을까?”

지난 4월16일 터진 ‘조승희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을 때 4800만 한국인들은 당혹스런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조씨는 1984년 1월 서울 도봉구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92년 미국으로 떠났다. 도미 이후 조씨는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미국 시민권을 따지 않았다. 법적으로 볼 때 그는 여전히 한국인이었고, 그 사실이 모국에 남은 4800만 한국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했을까. 처참한 살인을 저지르고 이미 숨져버린 조씨의 머릿속에 오갔을 미세한 감정들의 변화에 대해 우리가 접근해볼 방법은 없다.


△ (사진/연합)

국적을 바꾼 이유? 편하니까

“한국인은 누구일까?” 호랑이가 마늘을 까먹던 기원전 2333년부터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변하는 중이다. 한반도 밖에 사는 해외동포는 2005년 현재 663만 명,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의 수는 4월23일 현재 93만8천여 명이나 된다. 인순이, 유승준, 대니얼 헤니, 이다 도시, 하인스 워드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들의 외연은 점점 복잡해지고, 우리는 그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보인다. 대체, 한국인이란 뭘까.

<한겨레21>은 문제를 조금 쉽게 풀어보기로 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다양한 사람 15명을 만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귀기울여봤다. 그들은 외국에서 국적을 바꾸거나 유지하고 있는 이민 1세대, 1.5세대, 2세들이었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정체성 고민에 빠져 있는 재일동포였으며, 한국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거나 한국에 대해 별다는 느낌이 없는 재중동포기도 했고, 한국 사회의 무지막지한 인종적 편견에 눈물 흘리는 외국인 노동자 출신 귀화인들이기도 했다.

시선의 주체를 바꿔보니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한국인의 모습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행된 ‘한국인’ 또는 ‘해외동포’에 대한 논의들은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들의 시선에 고정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인’ ‘자랑스런 한국인’ 담론에 갇혀 그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만 하고 듣고 싶은 답변만 들어왔던 것 같다. 다양한 ‘한국인’들이 쏟아내는 사연들은 저마다 달라서 그것을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길민정(34)씨는 1997년 캐나다로 옮겨 살게 된 이민 1세다. 그는 2005년에 캐나다 국적을 취득했다. 법적으로 그와 모국인 대한민국을 이어주는 끈은 지난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뿐이다. 법은 한반도 밖에 나가 사는 한국인을 ‘재외동포’라 부른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한 채 외국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을 ‘재외국민’으로, 본인이나 부모, 조부모 가운데 한쪽이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사람을 ‘외국국적동포’로 분류하고 있다. 재외동포는 한국인의 피가 섞였냐를 묻는 민족적 개념이고, 재외국민은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법적 개념이다. 한국 정부의 행정력은 외국까지 미치지 못해, 외교부는 663만 해외동포 가운데 재외국민이 몇 명이고, 외국국적동포가 몇 명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길씨의 법적 지위는 ‘외국국적동포’로 한국을 드나들 때 출입국 과정에서 내국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딱 한 번뿐이다.

그는 국적을 바꿨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국적을 바꾼 이유요? 캐나다에 살려면 여기 국적이 더 편하거든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는 성인이 된 뒤 캐나다로 왔기 때문에 별다른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국에 대한 정서는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관전할 때를 빼면 모국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실하진 않다. “아무튼…, 한국이 고향인 것은 사실이니까.”

왜 한국말 못하냐는 질책에 스트레스 받아

최유정(45)씨는 “나를 재미동포라 부르는 게 싫다”고 말했다. 1963년생인 그는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미국에 왔다. 이민 1.5세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1970년이다. 그는 “나의 정체성은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말했다. 이때 방점이 찍히는 곳은 코리안이 아닌 ‘아메리칸’이다. 최씨는 1993년부터 6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그때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이중국적자였다. 3개월 동안 고민한 끝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로 했다. “한국과는 생각이나 생활방식도 다르고, 친한 사람들이 다 미국에 있거든요.” 한국에 있었을 때 모국인들로부터 정체성을 시험하는 무수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너는 한국인인데 왜 말을 못하냐.’ ‘뿌리가 없어서 불쌍하다.’ 6년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그 증상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구한 뒤에야 잦아들었다. 강엘렌(44)은 “코리안 아메리칸은 나름의 정체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은 그에게 “스스로 한국인임을 느끼거나 한국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냐”고 물었는데, “질문 자체가 낯설고 이상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코리안 아메리칸이 한국을 낯설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얻기는 매우 까다롭다. 필기시험을 본 뒤 면접을 기다리는 귀화 신청자들.(사진/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물론 한국에 친밀감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석엘리자벳(34)은 “늘 한국인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살고 있고,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그도 10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인들로부터 “왜 한국말을 못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밝혔다. 미국 뉴저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김동용(35)씨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84년에 와서 3년 동안 미국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미국으로 간 것은 1989년이다. 그는 여전히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이 편하지만, 한국이 고향이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진 않지만, 한국 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정지혜(29)씨는 재일동포 3세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가나야마라는 일본 이름을 썼고, 일본인 친구들은 ‘당연히’ 그가 한국인인 것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간 뒤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불만이 커졌다. 일단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꿨다. 그리고 처음 간 곳이 미국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인 척해야 했는데, 그런 신경을 안 써도 되니까 좋았죠.” 이후 “일본 국적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의 부모는 화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재일동포 1~2세의 한을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고민 끝에 한국으로 와 말을 배우면서 유학 생활을 했다. 모국인들은 “말도 못하면서 무슨 한국인이냐”고 힐난했고, “부모가 어떻게 교육을 시켰냐”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는 “한국은 너무 민족주의적·보수적이고, 재외동포 특히 재일동포 문제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곤란하면 버리는 정부의 자세가 싫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답을 찾아나가는 중이죠.” 그는 아직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재일동포 한흥철(38)씨도 “일본은 한국과 가까워서 왔다갔다 하니까, 지금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해외동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

김명화(24)씨는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에서 나고 자란 재중동포다. 그의 할아버지가 1925년 중국 선양으로 이주해왔다. 김씨는 랴오닝성 다롄에서 대학을 마치고 지난해 베이징으로 옮겨왔다. 어머니는 한국에 건너가 파출부로 일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느낌요? 대학 때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본 적이 있어요. 그들과 역사를 얘기하면서 한민족이라는 느낌을 받긴 했죠.” 그는 “중국 생활에 익숙해, 한국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 박이스라르씨는 “한국의 인종차별이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품을까. 아이들은 별다른 고통 없이 공부하고, 취업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사진/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정민섭(57)씨의 사정은 다르다. 그는 경기도 일산의 한 다가구 주택 단칸방에서 술에 취한 채 <한겨레21> 취재진을 맞았다. 정씨는 1950년생으로 고향은 중국 헤이룽장성 쑤이화시. 부친(정용백·1913년)이 중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1935년 고향인 경남 합천을 떠났다고 했다. 그의 조부는 1919년 약산 김원봉이 만든 비밀결사단체 의열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으는 데 애쓴 정두희(1896~1922·1980년 독립유공자 서훈) 선생이다. 2005년 3월18일 그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에게 보낸 ‘귀화허가신청서’에는 “독립운동가 정두희씨의 후손으로서 남은 인생을 고향에 와서 부모님들을 그리며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살기를 원하며 국적 귀화 신청을 올린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서류를 접수시킨 게 벌써 2년 전인데 아직 회신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적을 받으면 독립운동가 후손이니까 제 앞으로 정착금과 유족 연금이 나오거든요.” 그는 “그 돈이 있으면 한국에서 편하게 여생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25일 저녁 8시, 파키스탄 출신 귀화인 박이스라르(41)씨의 집을 찾았다. 부인 박영금(38)씨와 딸 시나(6)가 기자를 맞았다. 박씨 부부는 1994년 경기 안양에서 우연히 만나 2년 뒤 시댁 파키스탄으로 가 결혼식을 올렸다. 박씨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4년이다. 그의 고향은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4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시골이라고 했다. 아들 하비비(9)는 매일 도장에 가 태권도 연습을 한다. 얼마 전 태권도 1품을 땄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이국적으로 생긴 것을 빼면 하비비와 시나는 영락없는 한국의 어린이다. 박이스라르는 “아이들이 파키스탄 말은 인사말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교육 여건상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파키스탄어를 공부할 기회를 갖기는 힘들 것이다. 파키스탄인들도 그들에게 “파키스탄 사람이 왜 말도 못하냐”고 힐난할까. 아이들의 눈은 맑았다.

박이스라르는 “국적을 바꾸고 싶진 않았지만, 아내가 너무 원하고 한국에 뿌리 내리기로 마음을 잡고 큰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귀화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부천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중동역에서 내렸고, 늦은 거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작은 고물상을 운영해 네 식구를 먹여살린다. 그는 “한국의 인종차별이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을 못 잔다

“아내에게도 못한 얘깁니다. 얼마 전 청량리 중앙시장에서 트럭을 대고 있었는데 뒤에서 BMW 승용차가 와서 빵빵대더라고요. 차를 몰고 제 앞을 지나다가 저와 눈이 1초 정도 마주쳤습니다. 그러고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지나가는데요. 아마 보통 한국 사람이었다면….”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는 “잘 살아보려고 이곳에 왔는데 10년째 제자리에서 맴돈다”며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했다. 박이스라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와 함께 전국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돌며 인권 교육을 하고 있다.

조승희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이스라르는 “조승희는 인종차별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정지혜씨는 “그런 식으로밖에 저항할 수 없었나 싶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 무지하며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다.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흥분하고, 환호하고, 비난하고, 판단하는 말잔치 속에서 주체가 돼야 할 사람들이 설 자리는 없다. 얼마나 공허한가. 그래서 조승희가 ‘한국인인지 아닌지’를 놓고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당신은 한국인이냐”고 묻는 모습은 (질문에 감춰져 있을지 모를 선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폭력적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다.


한국인 피 4분의 1만 되면 동포

1999년 시행된 법률, 중국과 옛 소련 지역은 자격 부여 대상에서 제외

우리나라 영토 밖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지만, 법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은 재외동포·재외국민·외국국적동포 세 가지다. 재외동포는 혈연적인 개념이다. 지금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거나, 본인 또는 조부모·부모의 한쪽이 한국 국적을 가졌던 사람은 모두 재외동포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재외국민’, 국적을 바꾼 사람을 ‘외국국적동포’라고 부른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던 조승희씨는 재외국민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인 프로 격투가 데니스 강, 어머니가 한국인인 대니얼 헤니, 하인스 워드 등은 외국국적동포로 분류된다. 기준은 조부모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한국인의 피가 4분의 1만 섞여 있으면 본인이 느끼는 정체성과 상관없이 재외동포로 분류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조선족’(재중동포)이나 ‘고려인’(재러시아동포), 재일동포 등도 재외동포에 포함된다. 1999년 공포·시행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 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사람들까지 동포로 포함한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별은 엄존한다. 법률로 신설된 ‘재외동포체류자격’에 따라 재외동포들은 자유롭게 모국에 머물 수 있지만, 중국과 옛 소련 지역에 사는 재외동포들은 자격 부여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선족·고려인들의 급격한 국내 유입을 막기 위한 조처로 보이는데, 사는 곳에 따라 같은 동포를 구별하는 명백한 차별 규정이다.



<한겨레2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