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네르바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서 지난 3월부터 11월14일까지 200여 편의 글을 써온 대표적인 경제 논객이었다. 리먼 파산 등 몇 가지 예측이 적중하면서 미네르바 팬덤 현상을 불러왔다.
올 3월부터 인터넷 포털 다음 '아고라'에서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던 그는 9월 들어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가히 '미네르바 신드롬'을 낳았다. 그가 최근 수개월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환율 급등을 예견하는 등 제도권 전문가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경제위기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10월 29일 살해 위협을 받았다며 최초 절필을 선언하고, 11월 14일 '국가가 침묵을 명령해 경제 관련 글을 쓰지 않겠다'며 온라인에서 사라진 그가 다시 출몰한 것은 오프라인 < 신동아 > 12월호.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온다, 환투기 세력 '노란 토끼'의 공격이 시작됐다"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그는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아고라에서 200여 편의 글을 쓸 때 '고구마 파는 늙은이'로 자신을 소개한 그가 신동아를 통해 밝힌 것은 증권사 경력과 외국 생활 경험이다.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50대 남자'로 알려져 있다. 기고문이 나온 직후 미네르바의 동창이라고 주장한 'readme'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은 그를 K라고 부르며 명문학교 출신에다 CEO로 재임할 때 존경받았던, 대한민국 0.1%에 속하는 극상위층이라고 주장했다.
미네르바가 극상위층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금융 등 경제 지식이 해박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다 은유를 많이 사용한 것도 신비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는 '39살 최미자', '맥도날드표 빨대' '노란 토끼' 같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즐겼다. 그가 새댁 이름으로 인용한 39살 최미자에 대해 증권 전문가들은 최미자는 '최고 미국 자본'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헤지펀드의 대표 격인 '퀀텀펀드', 결국 조지 소로스를 지칭한다고 풀이했다. 퀀텀펀드가 1969년에 설립되었으니 회사 나이가 39세인 사실과 일치하는 추정이다. '맥도날드표 빨대'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헤지펀드의 공습을 경고하는 메시지라는 외환 딜러들의 풀이가 나온다. 현재 한국 시장은 헤지펀드들이 그가 '소주'로 은유한 한국 자본을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누리꾼은 물론 금융 전문가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노란 토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조지 소로스가 특히 타이와 홍콩 외환시장을 공략할 때 '노란 토끼'라는 은어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증권가에서 나왔는데, 미네르바 역시 소로스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환투기 세력'이라고 확인했다.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환율을 끌어올렸던 바로 그 세력으로 외양은 미국 헤지펀드이지만, 그 배후에는 일본 엔캐리 자본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노란 토끼다." 엔캐리 트레이드는 0%대 금리 엔화 자금을 빌려 고수익이 기대되는 나라의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경제에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엄습?
최근 < 신동아 > 에 투고한 글은 그가 지난 8개월여 썼던 글 200여 편의 집대성이자 최신판 성격을 띤다. 강도도 셌다. 코스피 지수가 500선으로 떨어지고 부동산 가격도 반토막이 나며 '노란 토끼'의 공격에 의해 한국은 연말 혹은 내년 3월을 못 버티고 일본 자본에 편입되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격렬한 파문을 몰고 온 이런 주장에 대해 경제학자 5명에게 평가를 의뢰했다. 국내 은행의 한 고위 임원과 외국계 은행 중견 간부,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민간 연구소 연구위원, 진보 성향의 재야 학자인데 금융을 전공하거나 금융회사에 몸담은 이들이다. 이들은 미네르바에 대해 적대적이기는커녕 우호적이었지만 열렬 지지자들의 공격을 의식한 듯 익명을 요구했다.
경제학자 5명은 예측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나름의 근거를 통해 경제 전체에 대한 큰 틀의 분석에도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네르바가 논리를 전개하는 방향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평가했다. 재야의 한 금융학자는 "주가와 부동산 값이 앞으로 가파르게 내리꽂힐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실물경제 위기가 어떤 방향과 강도로 경제를 덮칠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가 500선, 부동산 반토막 언급은 무리가 있다"라고 평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최악의 상황은 한국 등 모든 나라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위기를 방치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했다. 그가 각국 정부의 노력이나 국제 공조 흐름이라는 역동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과 함께 최근 미네르바로 지목되는 소동을 겪은 유시민 전 장관 말마따나 경제 예측에는 나름의 근거가 제시되지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특히 주가나 부동산 값 같은 가격 예측은 위험하다. 가격의 방향성이 중요할 뿐 숫자 그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게 증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란 토끼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이 쏟아졌다. 민간 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지난해부터 은행의 예대율이 100%를 넘어섰다. 은행들은 예금에서 대출을 충당하지 못해 CD나 은행채를 팔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그런데 주요 매입 주체가 헤지펀드 같은 외국 자본이 아니라 국내 펀드로 알고 있다"라며 일본 자본의 공격 자체를 일축했다. 은행의 한 고위 임원도 "글로벌 펀드에는 몇 단계로 돈이 유입되므로 그 돈이 어떤 돈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설령 한국의 은행들이 발행한 CD나 은행채를 엔캐리 자본이 녹아 들어간 헤지펀드가 상당수 매입했다 해도 이것을 한국을 편입시키려는 일본 자본의 의도로 해석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말 일본이 조직적으로 공격했다면 금융시장에 노무라 같은 일본계 자본의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정황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외국계 은행의 중견 간부도 "엔캐리나 '와타나베 여사(초저금리 엔화로 고수익 해외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일본의 전업주부)'로 대표되는 일본계 자본이 글로벌 자본의 최대 공급처인 것은 맞지만, 한국에 대한 투자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재야의 한 금융학자는 "미네르바 주장처럼 엔캐리 자금이 한국 은행들의 CD를 헤지펀드라는 우회 경로로 대거 사들였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한국을 망하게 해서 무슨 실리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만약 미네르바의 모든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은행 CD는 원화로 발행한 것이므로 CD 상환 요구를 원화로 하면 된다. 설령 일시에 몰려 은행들이 상환 불능 사태에 처하더라도 이를 중앙은행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사태가 현실화할 수 없다"라고 반응했다. 정부는 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금융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엔캐리 자금 동향을 지켜보기는 하지만, 위협 요인은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결국 미네르바가 막판까지 그토록 강조한 한국 경제의 일본 편입이라는 '노란 토끼 침탈론'은 전문가 5명에 의해 거의 깡그리 부정된 것과 마찬가지다. 정도 차는 있지만 이들이 미네르바의 다른 주장에 대해 동의 혹은 가능성 있다고 본 것과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검은 백조(The Black Swan)' 개념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월가에서 투자 분석가로 활동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지난해 펴낸 < 검은 백조 > 에서 소개한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 혹은 사건' 또는 '전문가가 계산한 확률 밖에 존재하는 사건'을 뜻한다. 세계 경제나 주식시장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극한의 충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 전례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네르바 주장처럼 우리가 생각할 때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미네르바가 극단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 들어 비관론이 자취를 감춘 것과 관련해 언로 차단을 경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가 애널리스트 사이에서는 '정부가 우국·호국 리포트를 내놓으라고 압박한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는 판이다. 그런 점에서 11월27일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대안적 정책을 내놓기 위해 만든 한국경제정책연구회의 창립 심포지엄에서 현직 증권사 임원의 언급은 '용감한' 지적이라 할 만하다. 조홍래 한국투자증권 리서치본부 전무는 "정책 당국자와 시장 참여자가 나쁜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황이 실제로 나쁜 쪽으로 흘러가면, 시장 참여자들은 기겁하고 정책 당국자들은 허둥지둥한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5~6개월 목격한 일인데, 이런 모습은 실제 위기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미네르바 신드롬이라는 '다중 지성'이 대안?
이 자리에서는 미네르바 팬덤 현상이 정부가 신뢰를 잃어 생겼다는 기존의 지적을 환기하며 미네르바 현상으로 대표되는 '다중 지성(多衆知性·swarm intelligence, 사회 이슈에 무리지어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을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강만수 장관을 바꾼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위기의 원인은 이명박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책결정 구조라는 큰 그림에 문제가 생겼다"라며, 궁극 해법을 인터넷 공간에서 찾았다. 인터넷 공간에는 경제 현상이나 정책을 이해하려는 국민의 욕구가 분출하므로, 경제정책 결정 구조의 민주화와 정책 담론의 진화를 위해 중요한 인터넷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1월24일 방송통신위원회 주최로 열린 '인터넷@한국 사회, 한국 사회@인터넷' 심포지엄에서도 제기되었다. '인터넷과 루머: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경우'를 발제한 김현경 박사(연세대)는 "아고라는 루머의 온상이라기보다 시장의 불확실성에 스스로 대처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깝다. 아고라에서는 추천, 평판, 다른 글 보기 같은 기능을 통해 근거 없는 주장은 걸러진다"라고 분석했다.
제도권 밖에서 익명의 섬에 숨어 최악의 상황을 제기하는 극단적 비관론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나 구성의 오류 같은 악순환을 낳는다는 부정적 시각과, 미래의 길흉을 예견하는 도참(圖讖) 같은 구실을 하는 그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는 긍정론까지, 미네르바를 이해하는 한국 사회의 스펙트럼은 간극이 넓다. 미네르바는 현인(賢人)인가? 극단적 비관주의자일 뿐인가?
‘도를 넘은 궁금함’ 조선일보 “미네르바, 누구냐 넌?” |
신문은 패러디칼럼에 낚이고, 기자는 엉터리 IP조회 폭로했다 망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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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선지자’, ‘아고라의 현인’, ‘인터넷 경제대통령’ 등등. 얼굴 없는 인터넷 경제 논객 ‘미네르바’에게 네티즌들이 붙인 별칭이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광장인 ‘아고라’의 경제토론방에 그가 올린 글들은 하나같이 폭발적인 조회수와 댓글, 그리고 각종 반론과 재반론이 따라붙었다.
한국 경제에 대한 그의 예측은 매우 시니컬하고 얼핏 보기에는 암울하기까지 하다. 단순 비교는 곤란하겠지만, 마치 미국 부시 행정부 기간 내내 ‘글로벌 경제위기’를 경고해 온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그것과 흡사하기도 하다. 굳이 이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꼽으라면, 크루그먼 교수가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인데 비해 미네르바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터넷 논객이라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예측은 대개 우울한 표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인터넷 경제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것은 그의 예측이 단순하게 반(反)이명박 진영에 속한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예측은 읽는 사람의 기분에 상관없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론에서 미네르바의 글에 주목하고 그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이다.
그런데 한국의 무수한 언론 매체 중, 유독 미네르바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자체 기사로만도 2개 이상 다른 매체의 ‘미네르바 낚시질’에 걸렸다. 또 최근에는 이 신문의 기자 한 명이 미네르바의 IP를 추적한 결과라며 그의 정체를 ‘폭로’했다가 ‘인터넷의 I자도 모른다’는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곽인찬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의 “내가 미네르바다”에 홀려
가장 최근의 사건부터 되돌아가보자. 지난 2일 오후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인 ‘조선닷컴’은 이날 오후 4시경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논설위원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기명 칼럼을 올리자 이를 냉큼 받아 “미네르바는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이라는 기사를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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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의 홈페이지 ´조선닷컴´은 2일 경제전문지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논설위원의 패러디 칼럼을 사실로 착각한 기사를 탑에 올렸다. ⓒ 조선닷컴 캡쳐 |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인터넷 논객으로 화제가 됐던 ‘미네르바’가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으로 밝혀졌다고 2일 파이낸셜뉴스가 보도했다”면서 “곽 위원은 2일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칼럼’을 통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고백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닷컴은 물론이고 각 포털사이트에서도 모조리 삭제됐다. <파이낸셜뉴스>가 곽 위원의 칼럼이 ‘패러디’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또 곽 위원 본인도 칼럼에서 자신이 미네르바라는 증거로 “나는 부엉이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운다”는 문장을 넣어 글 자체가 ‘패러디’임을 강하게 암시한 바 있다. 결국 <조선일보>의 이번 해프닝은 곽 위원의 칼럼을 꼼꼼하게 읽지 않고 서둘러 기사를 작성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시 말해,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의 정체에 대해 그만큼 몸이 달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네르바 경제관료 기용설”에 확인 없이 낚인 조선일보
미네르바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오보 소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지난 11월 20일에도 <한국일보>의 서화숙 편집위원이 “정보당국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찾은 것은 경제 관료로 기용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을 담은 패러디칼럼을 썼을 때도 사실에 대한 확인 없이 “靑 ‘미네르바, 처벌 아닌 경제관료로 기용’ 주장 진위 여부 주목”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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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인찬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의 칼럼이 패러디로 밝혀지자, 조선닷컴은 황급히 기사를 대체했다. ⓒ 조선닷컴 캡쳐 | 당시 서 위원은 칼럼에서 “익명의 (청와대) 소식통이 ‘미네르바를 기용해서 정확한 현실 진단을 한 뒤 향후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하지만 서 위원은 글 말미에 단 ‘주석’을 통해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의 주요 보직을 맡은 비서관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논평과 해설에서 ‘청와대 핵심 관계자’라는 익명을 남발한다”며 “현실 공간에서 익명을 즐기는 그들이 사이버 공간의 익명을 가장 심하게 단속하는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자신의 글이 ‘패러디’라는 암시를 강하게 남겼다.
서 위원은 또 글에서 소개한 발언자들을 “청와대 핵심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익명의 소식통”, “재야의 비공개 소식통”, “청와대 소식통”으로 표현해 사실상 확인된 것은 없음을 시사했다. 결국 서 위원의 ‘낚시질’에 다수의 언론이 ‘낚였고’, <조선일보> 역시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IP 조회 기본도 모르는 기자까지 가세, 망신살
<조선일보>의 이러한 ‘미네르바 숨은 그림 찾기’에는 이 신문의 기자도 동참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당 기자가 인터넷의 기본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미네르바의 정체를 ‘폭로’씩이나 했다는 데 있다.
지난 11월 20일 새벽 2시 14분 경, 조선닷컴 내의 한 기자 블러그에는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 추적”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조선일보 48기’라고 소개하고 있는 양 모 기자는 글에서 “다음 아고라에서 온라인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미네르바가 실제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장장 2시간의 온라인 추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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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의 양 모 기자는 자신의 블러그에 황당한 IP 조회를 바탕으로 미네르바의 정체를 ‘폭로’했다가 네티즌들의 ‘성지순례지’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 블러그 캡쳐 | 양 모 기자는 미네르바의 IP인 ‘211.49.***.104’를 근거로 IP 검색 사이트인 후이즈에서 해당 IP를 검색했다. 양 기자는 “그 결과, 그곳은 약간의 TV, 약간의 인터넷 어쩌고 하는 ‘SK브로드밴드주식회사 여의도 본점’이었다”며 “아마도 미네르바는 저 회사 제공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이어 그는 미네르바가 지난 11월 14일 “여기는 아동병동”이라면서 아고라에 올린 글 “침묵이 금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에 주목한다. 양 기자는 “아동병원에서 글을 올린다는 미네르바의 IP는 ‘211.178.***189’다. 이 IP는 SK브로드밴드 여의도점 제공 IP”라면서 “이건 뭔가. 과연 미네르바는 늘 진실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심각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양 기자의 ‘추적’은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그는 구글에서의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211.178.***189’이라는 IP가 ‘MLBPARK’라는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 모씨”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양 기자는 자신의 추측을 근거로 미네르바를 “SK브로드밴드주식회사 여의도 본점 제공 IP를 쓰는 30대 남성으로, 메이저리그 특히 뉴욕양키스를 좋아하며 차는 렉서스GS350에 관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양 기자는 한 발 더 나가 “잠 안자고 좀 더 인터넷을 뒤진 결과 결국 나는 미네르바의 실명까지 알게 됐다”며 “미네르바는 71년생 남자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양 기자의 이러한 ‘폭로’는 ‘특종’이 되기는커녕 네티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해 결국 양 기자의 블러그는 일종의 ‘성지순례’ 장소로 전락했다. “KT 사용자 IP를 검색하면 거의 절반이 분당구 정자동으로 나온다. 모든 사람이 고정아이피를 사용한다고 해도 동일한 IP를 쓰는 사람이 256명이 존재한다”는 게 주된 이유다.
네티즌들은 양 기자에게 “초딩(초등학생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 같은 짓 그만두라”,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을 쓰면 다 미네르바냐”, “전체 공개도 되지 않는 IP를 가지고 소설을 써놨다”는 등의 조롱성 댓글을 남겼고, 양 기자는 결국 해당 글을 자신의 기자 블러그에서 삭제했다.
삼고초려 아닌 삼고초려가 되어버린 조선일보의 숨은 그림 찾기
미네르바의 정체에 대해 네티즌들과 언론이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의 예측이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건, 희망의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건 간에 우리 경제 상황과 맞물린 미네르바의 예측은 ‘불행하게도’ 거의 다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특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경제논객 자체보다는 그가 예측하고 전망하는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한 대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에는 ‘삼고초려’라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이 일화의 주인공 유비는 당시 의지할 곳도 변변치 않았고, 세력조차 미미했다. 장수라고는 의형제들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뿐이었다.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책사가 필요했던 유비는 제갈량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로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날은 저무는데 묵을 주막은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경제상황이 악화될수록 더 많은 ‘미네르바들’이 나올 수도 있다. 자칭 ‘1등신문’인 <조선일보>의 세 번에 걸친 눈물겨운 ‘미네르바 숨은 그림 찾기’가 어떤 의도인지는 <조선일보>의 데스크 외에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제는 미네르바가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공개하는 것도 그의 예측에 대한 신뢰도 쌓기 측면에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
삼고초려 아닌 삼고초려가 되어버린 <조선일보>의 ‘미네르바 정체 찾기’ 기사.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명대사 하나를 빌려온다면,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닐까.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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