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출간한 경제비평서.
1963년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발표하고, '중간기술 개발그룹'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던 독일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가 1973년에 출간한 경제비평서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 발전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개발도상국의 선진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개발도상국 내에서의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새로운 발전방향이 논의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중간기술의 중요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중간기술이란 생태계를 배려한 소규모의 비용이 들지 않는 기술이다.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은 근대기술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비하여 자원재생과 지역 에너지의 활용을 도모하는 동시에 지역의 고용관계까지 배려하는 기술이다.
이것은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이래 200년을 지배해온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술이 그대로 중간기술이 된다고는 할 수 없으며, 또한 선진기술을 발전시킨 중간기술도 있을 수 있다. 에너지 절약적인 중간기술은 근대기술을 초월하는 대체기술(alternative technology) 혹은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라고 정의된다.
2002년 문예출판사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인간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다.
E. F. 슈마허(1911~1978)는 독일출신의 경제학자라고만 설명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나치를 비판해서 영국에서 활동했는데 전후 아시아 각국의 경제고문으로 있었고 거대기술과 대비되는 [중간기술]이라는 것을 제창했으며 불교에도 관심이 많은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는 주로 주류경제학의 성장의 문제를 지적했고, 이제는 널리 일반화됐지만 당시의 시대분위기에서는 획기적이랄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주목했으며 무엇보다 경제학이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고민한 현대의 지성입니다.이 글의 출전은 범우사에서 나온 <작은 것이 아름답다>(E.F 슈마허/김진욱 옮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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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에필로그 부분
과학과 기술의 힘의 발달에 열중한 나머지 현대인은 자원을 남용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생산 체제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부(富)만 증진되면 모든 일도 풍요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을 만능으로 여겼다. 정의나 조화, 미(美), 건강 등의 비물질적인 가치는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책략을 부려서 필요한 것은 입수할 수 있고 손실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의 발달과 부의 획득이 근대 세계의 최고의 목표가 되고 그 밖의 목표는 아무리 입으로는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고의 목표는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이차적인 목표들은 결국에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주의의 철학이고 지금 현실적인 사건의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철학-내지는 관념-이다. 세계의 어떠한 지역, 어떠한 사회에 있어서도 물질주의에 도전하고 우선 순위의 다른 질서를 주장하는 철인이나 스승이 없는 때는 없었다. 말은 다르고 상징도 다양하지만 선언은 언제나 동일하다. "처음에는 신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여)이 그대의 것이 되리라." 그것은 이 지상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상상력을 초월한 내세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오늘날은 철인이나 성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사건을 통해서도 우리가 듣고 있다.
그것은 대량학살, 몰락, 오염, 고갈 그리고 테러리즘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독특한 수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신의 왕국에 대한 놀라운 말속에는 장래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라 위협도 포함되어 있다. 그 위협은 "처음에 신의 왕국을 구하지 않으면 필요한 것을 입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어떤 저술가는 정치나 경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근대세계의 핵심을 찌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집단적으로 진실로부터 자꾸만 물러선다면 진실 쪽에서 모든 방면으로 인간에게 접근할 것이다. 과거에는 진실에 접근하려면 생애의 노력이 필요했으나 지금의 인간은 진실로부터 물러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나 교육, 연구 개발 등의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하여 공해와 싸우고, 야생의 동식물을 보호하며,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발견하고, 평화 공존에 관해 지금보다 더 실효가 있는 협정을 맺기만하면 현대의 파괴적인 힘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진로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셈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부나 교육, 연구 개발 등은 어떠한 문명에나 필요한 것이지만, 오늘날 무엇보다도 더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수단을 사용하는 목적 자체를 고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제일의적인 지위가 아니라 종속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엮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의 논리'란 생의 논리나 사회의 논리가 아니며, 이 두가지에 종속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논리에 의해 해방된 파괴력을 제어하려면, '생산의 논리' 자체를 억제함으로써 파괴력 있는 폭발이 정지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무서운 기계나 병기를 생산하는 일이 인간의 창조력을 올바르게 이용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동안은, 테러 행위를 억제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또 생산 양식과 소비 양식이,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따라야할 우주의 법칙에 맞지 않을 만큼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폭력적인 것이라면 - 그러한 경향이 더욱 분명해져 가고 있다 - 공해에 반대하는 싸움도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또 마찬가지로 물자는 알맞기만 하면 되며, 너무 많으면 그것은 곧 악이라는 사상이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동안은, 자원 소비의 속도를 늦추거나, 부자나 권력자, 가난한 사람이나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조화시킬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의 인식이 점차 - 지나치게 신중할 정도이지만 - 일부 정부 발언이나 그에 준하는 발언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좋은 징후이다. 환경 담당 국무장관의 자문에 응하여 작성된 보고 속에, "가치관을 고치고, 정치의 목표를 전환시킬" 기회를 기술 선진국들이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그것은 '도덕적인 선택'일 뿐, "아무리 계산해도 그것만으로는 해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의 젊은이가 재래의 가치를 근본적인 것부터 의심하고 있는 것은, 공업 문명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이 퍼져 가고 있는 징후이다." 공해를 억제하여 세계 인구와 자원 소비의 관계를 지속적인 균형 상태로 가져가야 한다. "이를 게을리하면 조만간 -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문명의 몰락이 현실화될 것이다. 우리의 자식이나 손자의 시대에 그것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덕적인 선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보고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깨끗한 환경을 위해 돈을 얼마나 지불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인간에게는 확실히 어느 정도의 선택의 자유가 있다. 유행이나 '생산의 논리' 또는 단편적인 논리 따위에 속박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리의 속박은 받는다. 진리에 따라야만 자유는 완전한 것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현행 제동 속박되어 있는 상상력을 해방 시켜라" 하고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도, 진리를 발견할 길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20세기의 인류가, 선인들도 알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류의 올바른 모든 전통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진리는 종교의 말로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그 말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표현은 바꿀 수 있다. 현재 진리를 살리면서 그것을 실해하고 있는 현대 작가가 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 속에도 4개의 기본 도덕, 즉 지혜(prudentia), 정의(justitia), 용기(fortitudo), 절제(temperantia)등의 훌륭하고 현실적인 가르침이 있다. 오늘날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지혜가 모든 덕목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는 것도 의미 심장한 일이지만, 그 의미는 오늘날의 '분별'이라는 말로는 전달될 수 없다. 그것은 금방 이익이 되는 것을 약속해 주지 않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평가하지도 않는 협량하고 비열하며 타산적인 생활 태도와 정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선을 실행하는 데 현실을 잘 아는 일이 선결 문제라는 의미이다. 사물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채고 있는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지혜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이른바 '충분한 고려'나 '선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선을 행하려면, 우리의 행동이 현실의 상황, 즉 구체적인 인간 행동을 위한 '환경'을 이루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합하고, 또 우리가 이 구체적인 현실을 편견이 없는 객관성을 갖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가 된다.
그렇지만 현실을 '조용히 묵상' 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관심을 일시적이나마 억제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편견이 없는 객관성에 도달하여 온전한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분별보다 더욱 큰 이 지혜가 있어야만 비로소 정의와 용기와 절제가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절제라는 것은 족(足)함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란 진리의 지식을 현실에 즉응(卽應)한 결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면, 이 지혜를 배우고 육성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 일이 있겠는가. 지혜만 있으면 문명이 살아 남는 데 절대 불가결한 그 밖의 세가지 덕목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정의는 진, 용기는 선, 절제는 미와 결부된다. 한편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가지 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진이나 선이나 미는 사회 생활이나 개인 생활의 최고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는, 혹은 진, 선(善), 미는 부와 권력이 손에 들어오면 저절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현실론이 '왜곡된 현실론'이라 지적되어 온 것을 옳은 것이다. 어디서나 "나는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간단치 않다.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라는 게 그 대답이다. 이에 필요한 길잡이는 과학기술에서는 얻을 수 없다. 과학기술의 가치는 모두 그것이 봉사하는 목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예지(叡智)의 전통 속에서 이 길잡이를 발견할 수 있다 (1973)
“조직은 규모가 커지면 반인간적으로 변해”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인간사고의 방향을 바꾼 극소수의 창조적 인물’로 칭송될 만큼 20세기의 지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세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에선 전통 경제학의 주류와 테크놀러지에 대해 거센 비판을 하고, 두 번째 저서인 ‘혼돈으로부터의 도피(A Guide for the Perplexed)’에선 첫 번째 저서의 내용에 철학적·도덕적 바탕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삶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저서 ‘좋은 작업(Good Work)’에선 오늘날의 테크놀러지가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초래하는 악영향을 파헤치고 있다. 독일 태생인 그는 1930년에 장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정부의 경제정책자문위원을 역임했고, 1977년 사망할 때까지 학술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슈마허가 그의 저작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다. 그가 주장하는 진정한 발전의 길은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정체’ 중의 택일이라기보다는 그 사이의 중용이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반근대적이다.
그것은 소규모·분산 지향적이며 반경제과학적(antieconomic science)이다. 1776년 애덤 스미드의 ‘국부론’ 이래 경제학자들은 모든 분야의 사회과학자 중에서 가장 엄밀하고 성공적인 과학자들로 자부해 왔다. 과학자이고자 하는 열망과 자부는 어느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것이었다.
리카르도와 시니어의 경제학을 ‘음울한 학문’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거부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며 생물학에 있어 다윈의 진화론과 견줄 만한 것이라 자랑했다. 그러나 슈마허의 경제학은 그런 유의 과학적 경제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늘날 주류 경제과학의 모든 가정과 전제에 뿌리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고 도전했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은 무정부주의자의 견해와 흡사하다.
이를테면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간디 등이 그들이다. 다른 무정부주의자와 달리 이들은 ‘조직의 규모’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소규모 지향적인 무정부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지만 사적 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유기업의 규모가 너무 거대하여 구성원 개개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다양한 형태의 사유기업이나 사적 소유는 환영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가 적이며 죄악이다. 규모의 거대함은 비인격성의 모체일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필요나 요구에 둔감하게 되고 권력의 독점이나 남용을 낳기 때문이다. 슈마허가 그의 주저를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임효선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
지은이 E. F.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독일에서 태어나 1930년 로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 뉴칼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스물두 살 때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실제 경험이 없는 이론화에 불만을 느낀 그는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기업가, 언론인 경제학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전쟁 중에는 옥스퍼드에서 잠시 학업을 재개했다. 독일의 영국 점령지역 통제위원회 경제 자문관, 영국 석탄공사 경제 자문관, 영국 토양협회 의장, 스코드 바더 사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개발도상국을 위해 중간 기술 개념을 창안하고 중간기술개발집단을 설립하여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외국 정부로부터 주목받았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으로 1974년에는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CBE)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주요 저서에『혼돈으로부터의 도피』『좋은 작업』『경제 성장의 근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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