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교계에서 피아노의 슈퍼스타로 이름을 떨친 프란츠 폰 리스트 Franz von Liszt 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작곡가로서 피아노곡을 비롯한 관현악곡과 종교 음악 등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음악교육에도 상당한 힘을 쏟아 후세의 음악가와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끼친 영향도 크다. 지금도 바이마르에는 그가 창설에 관여한 리스트 음악원이 있다. 그런 리스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음악장르에 교향시라 불리는 것이 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교향곡과 교향시는 어떤 점이 다를까? 우선 제일 큰 차이는 악장의 수이다. 교향곡은 복수의 악장을 가지지만 교향시는 1악장만으로 완결된다. 관현악(오케스트라)을 위한 곡임은 둘 다 같다. 그리고 교향시는 곡을 설명하는 표제와 문장을 동반하지만 교향곡은 순수한 기악만의 관현악을 말한다. 교향시의 작곡가로서는 리스트를 비롯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나의 조국>의 스메타나 등이 알려져 있고 이에 반해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은 교향곡의 유명한 작곡가이다.
리스트가 교향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854년이다. 이미 5년 전에 서곡으로 만들고 있었던 타소 <비탄과 승리>를 개정하여 연주할 때 비로소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으로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탄생시킨 베를리오즈와도 돈독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리스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한 다구 백작 부인과는 베를리오즈의 집에서 만났다고 한다. 리스트가 교향곡에 사용한 표제는 바이런의 시와 셰익스피어, 위고의 문학에서 채용하는 일이 많다. 타소 <비탄과 승리>도 바이런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한 그의 교향곡 중에서 들을 기회가 많은 것은 <전주곡>일 것이다. 곡의 중반쯤부터 시작되는 금관악기의 빛나고 당당한 음향을 가진 프레이즈(phrase 보통 4마디로 이루어져 있는 짧은 악절)는 아마도 어딘가에서 들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표제는 라마르틴이라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스 시인의 시집 <시적 명상> 속의 장편시 <전주곡>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쓴 "인생은 죽음으로 시작되는 알지 못하는 노래의 전주곡이다"라는 시가 지닌 이미지를 리스트는 교향시로 만들었다.
곡은 알지 못하는 노래인 죽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신비스럽고 조금은 답답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상처받은 영혼이 찾고 있는 전원생활의 사랑스러운 고요의 추억'을 나타내는 포근하고 따스함이 넘쳐 흐르는 멜로디도 있다. 그리고 금관악기의 울려 퍼지는 음색이 운명과 맞서 나가는 인간을 묘사하여 마지막에는 승리를 쟁취한 인간의 모습이 풀 오케스트라로 당당하게 그려진다.
<클래식 음악 100>
Franz von Liszt (1811~1886)
헝가리 라이딩에서 에스텔하지 후작의 토지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9살 때인1820년 프레스부르크에서 독주회를 가져 천재가 나타났다는 평을 받았다. 1823년 빈으로 가서 K. 체르니에게 사사하면서 A.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다시 파리로 가서 파에르와 라이하로부터 화성(和聲)을 배웠다. 다음해 파리에서 데뷔한 후 프랑스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고, 런던에서도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27년 여행길에서 부친을 여의고 수년 동안은 고난의 시기였으나, 그 동안에 체험한 7월혁명(1830), 여제자 카롤린과의 사랑, 페티스, 쇼팽,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과의 만남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특히 파가니니와의 접촉으로 그의 연주는 종래 체르니의 스타일로부터 명기주의(名技主義)의 스타일로 전환하였다. 그 후 교향시 창조의 기반이 되는 문학적 교양을 쌓고, 6세 연상인 다구 백작부인도 이 무렵에 알게 되었다. 1835년 리스트와 부인은 제네바로 가서 동거생활에 들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브랑딘, 코지마, 다니엘 등 세 아이가 태어났는데, 코지마는 후에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그는 1838년 빈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일대를 무대로 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바이마르에 정주(定住)한 1847년까지 계속되었다. 1847년 유럽 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리스트는 바이마르에 정주하였고, 그것은 동시에 여행 중에 알게 된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바이마르에서는 지휘자 ·작곡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 폭넓게 활동하였으며, 지휘에서는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창작면에서도 <3개의 연주회용 대연습곡> <초절기교연습곡(超絶技巧練習曲)>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의 피아노곡, <파우스트교향곡> <단테교향곡> <전주곡> <타소> <마제파> <오르페우스> <이상(理想)> 등의 교향시와 대표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1861년 후작부인과의 결혼식 때문에 로마로 갔으나 부인 친척의 이의(異議)로 실패, 그 후 부인은 종교생활에 들어가고, 리스트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동안 흑의(黑衣)를 두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종교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69년 로마에서 바이마르로 돌아와서는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상의 명기주의의 완성과 표제음악의 확립이라는 음악사상 매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하여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헝가리광시곡>과 <순례의 해>를 포함한 피아노곡과 교향시이다. <참고 : 헝가리 광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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