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 불을 올려서 변경의 긴급한 정황을 알리는 옛 신호방법입니다. 우리나라 봉수제도(烽燧制度)의 기원은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이
그 왕비를 맞아들일 때 봉화를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방상
필요에 의해서 봉수대를 쌓고 군사를 배치하여 조직적으로 운영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 때부터입니다.
봉수는 동북쪽은 경흥, 동남쪽은 동래, 서북쪽은 강계와 의주, 서남쪽은 순천 등
5군데를 기점으로 서울의 남산에 집결되었습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온 나라의 봉수대 수는 650여 곳이고, 각 봉수대에는 40∼50명의 군사가 지킵니다.
또 봉수대 가까이 사는 백성은 봉수 재료인 싸리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긴 다음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바쳤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엔 보부상이 봉수를 보조했는데
그들은 봇짐과 등짐으로 이 시장에서 저 시장으로 옮겨가며 장사를 하면서 문서나
말로 통신을 전하였습니다.

§§§ 이 글에 대해 한국어정보학회 진용옥 회장님께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보내셨습니다.
"원족산 봉수대는 잘못 복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궁이와 아궁이 사이가 1미터 이상의
간격이 아니면 12~15 킬로 미터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검출한계 이론이지
요. 그리고 원통보다는 독처럼 빨아야지 밋밋하게 생기면 불이 피워지지도, 잘타지도 않
습니다. 이것은 내가 실제로 실험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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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363. 마음속의 시름을 달래주는 젓대(대금)소리 (2005/06/27)
대금은 국악기 중 죽부(竹部:대나무로 만든 대금, 피리, 단소 등의 악기)에 속하는 공명악기(공기를 진동시켜 소리 내는 악기)이며, ‘저’ 또는 ‘젓대’라고도 합니다. 정악만을 연주하는 정악대금(正樂大笒:풍류대금)과 민속악인 산조만을 연주하는 산조대금(散調大笒:시나위젓대)의 두 종류가 있고, 살이 두껍고 단단하며, 양쪽
줄기에 홈이 깊이 팬 병든 대나무인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든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이것을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바람과 파도가 자는 등 만
가지의 모든 나쁜 일이 물러 난다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른 악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악기가 대금일 것으로 봅니다. “한 가락 젓대를 불어 일만파도
다 눕히면/한라도 구름을 열고 달을 띄워 이더라.”(정완영님의 ‘한라의 달’이란 시
일부) 우리도 젓대소리를 듣고 마음속의 시름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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