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임금은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과 부채를 쓰지 않고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으며,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곤 했습니다. 또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했지요.
또 세종임금은 “병든 사람은 한증소(汗蒸所, 지금의 사우나 비슷한 곳)에 와서 땀을 내면 병이 나을 것이라 했지만 죽은 사람이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널리 물어보아 이익이 없으면 없애고,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살피도록 하되 환자의 병 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약한 사람은 그만두게 하라.”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종임금은 백성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세를 보였으며, 어려움을 호소하며 바로 처리해준 성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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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262. 일본인을 두렵게 한 이상재 선생의 소나무 2005/03/18
소나무는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조선시대엔 소나무집에서 태어나서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가는 삶이었습니다. 이 우리의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먼저 알린 탓에 세계에 '일본소나무(Japanese red pine)'로 알려졌습니다. 또 일본인들은 척박한 땅에 자라는 소나무를 보고, 한국의 운이 다했다는 억지 논리를 폈는데, 이는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는 소나무의 질긴 생명력을 모르는 소치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상재선생은 일본의 거물정치인이 집을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 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일본인들의 망언이 극에 달한 지금 이상재 선생의 기개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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