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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밑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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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8. 9. 1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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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함 가문의 가훈 “지고 밑져라”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008. 09. 19.
 
 

 

 

      우리 겨레가 삶 속에서 실천하기를 가장 강조한 것은 이웃에 대한 ‘배려’ 곧
      “더불어 삶”입니다. 퇴계나 다산 등은 편지로 자식들에 한 교육을 통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먼저 베풀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재령이씨 이함 가문에는 ‘지고
      밑져라.’라는 가훈을 400년 동안 이어왔다고 합니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저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은 백성을 수탈한 양반집을 급습해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습니다. 이때 경주최부자 집도 불탈 뻔했지만, 최부자 집의 내력을 확인한
      동학도는 불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최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이웃과의 “더불어
      살았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집안의 적선은 미래를 위한 저축이었습니다.
      원래 풍수지리에서 양택(집)의 풍수는 아무리 명당자리라도 당대에 그치지만
      경주최부자 집은 “더불어 삶” 덕에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 : 월간문화재사랑 “명문가에서 배우는 자녀교육 ‘아버지의 귀환’”,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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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385. 빨래터와 사랑방, 모정과 정자   2005/07/19

          

      조선시대의 민중은 허리가 휘도록 많은 일을 해야 했고, 엄청난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 민중들도 농한기에는 모여서 놀거나 수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이는 장소는 누구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여인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앉아
      빨래를 두드리며, 집안일의 고단함, 지아비나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 살림 걱정
      등 힘든 세상살이를 함께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빨래터처럼 툭 터진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건물입니다. 겨울에는
      사랑방에 모여 앉았고, 여름엔 모정과 정자에 모였습니다. 모정은 일을 많이 하는
      서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을 들머리나 들판 한 가운데에 방이
      없이 마루로만 된 작은 초가였습니다. 대신 양반들은 경치좋고,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정자에 모였는데 ‘식영정’처럼 이름을 붙였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신분에 따라 모이는 장소가 달랐습니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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