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은 '붓(毫)으로 먹고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또 최북은 그림 그리기를 강요하는 사람 앞에서 강요에 의해서는 그릴 수 없다며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어 돋보기 안경을 사도 한 알만 샀다고 하지요. 그 최북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천하 명인 최북이가 천하 명산 금강산에서 안 죽는다니 말이 되느냐?”라며 시퍼런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마침 동반한 친구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합니다.
천성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열풍같은 무서운 성격이었던 그는 의미 있는 그림을 선사하고도 반응이 변변치 않으면 두말없이 그림을 찢어 버리고, 의미 없는 그림에도 반색을 보이는 이가 있으면 도리어 뺨을 치고 받은 돈을 돌려주었다고 하니, 패기가 용솟음치는 기개의 화가였습니다.
임금과, 왕비, 세자 가까이서 그들의 손발이 되어 주는 궁녀들은 나인과 상궁이 있는데 그 수가 6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궁녀는 ‘궁중 여자 관리’의 줄임말로 품계를 받은 여자관리 즉, 후궁과 궁녀를 통틀어 ‘내명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궁녀 중 임금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지밀나인’이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걸음마를 겨우 뗐을 때부터 뽑혀 들어와 글과 예절 따위를 익히는 특별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애기나인’ 즉, 성인이 되기 전의 궁녀는 20살을 앞뒤로 신랑없는 혼인식을 겸하는 성인식을 치른 다음, 두 명씩 한 방에서 살림을 차리고, 정식 나인이 됩니다. 그렇게 둘이서 외로움을 달래며 15년 세월을 보내면 상궁이 되고, 그 뒤로도 속절없이 궁궐에 봉사하다가 처녀로 죽어가는 것이 궁녀의 숙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