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용이 바닷가로 귀양을 오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던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20년 동안 세상의 험한 길에 빠져 지내느라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공부를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야 그럴 겨를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기뻐했다. (鏞旣謫海上念幼年志學 二十年沈淪世路 不復知先王大道今得暇矣 遂欣然自慶)” 위 글은 다산 정약용이 직접 쓴 자신의 묘지글입니다.
다산은 19세기가 시작되는 1801년 시기와 질투에 의한 모략과 중상에 빠져 남도 끝 마을 강진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40살 한창 꽃 피워야 할 즈음 그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어린 시절 뜻을 두었던 학문을 닦는데 매진했지요. 그 결과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무려 492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다산의 18년 유배는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세월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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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892. 옛 선비들은 시서화와 음악을 모두 잘했다 2006/12/19
드라마 황진이를 보면 벽계수 대감이 거문고를 탑니다. 그런데 거문고를 타는 벽계수 대감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옛 선비들은 집에 거문고 하나쯤 있고, 그것을 탈 줄 아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정철처럼 특별히 시에 능한 사람도, 안평대군처럼 글씨에 뛰어난 사람도, 윤두서처럼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도, 대원군처럼 난을 잘 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서화와 음악을 두루 섭렵했습니다. 안평대군도 백과사전에 보면 “시문(詩文),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라고 소개합니다.
또 선비의 집을 '난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의 ‘난형지실(蘭馨之室)’로 불렀으며, 선비들은 예로부터 운치 있는 4가지 일(四藝)로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꽃을 꽂았습니다. 이렇게 옛 선비들은 부단히 자신을 닦고, 예술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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