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년(숙종 21)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중략)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왜인들이 “우리는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물러갔다. 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라 하며 우산도로 달려가니…”
위 글은 조선후기 학자 이익(李瀷)이 1740년경에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중 "천지문"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글에서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며, 송도도 우리의 땅"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또 글에서는 왜인들이 이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 지금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뻔뻔합니다.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믿었기에 껴묻거리 곧, 부장품이 필요했습니다. 이 껴묻거리 중에 흙으로 사람 모습을 만들어 묻는 것을 토용(土俑)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물론 하인들을 산 채로 묻었는데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나중엔 산 사람 대신 토용을 묻었던 것인데 우리나라 것으로는 신라토용이 있습니다. 토용은 옷과 모자, 그리고 악기나 물건 등을 같이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을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토용 가운데는 젖가슴이나 엉덩이 그리고 성기 등을 과장하거나 임신한 여성을 표현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아이를 많이 낳기 바라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백성은 큰 자산이기 때문에 다산은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인형 말고는 장식항아리, 집 모양, ‘뱀과 개구리’들도 있습니다.